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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식 신부 구속사건[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마지막회]

친미의 나라, 전두환 5공화국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자마자 등장한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전두환)’는 정치적 반대세력을 구속수배하는 한편, 김종필 등 유신 핵심인사를 공직에서 사퇴시키고, 김영삼 신민당 총재를 정계에서 은퇴시켰다. 이로써 내란음모사건으로 이미 구속된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적 반대세력은 모두 구속, 수배되거나 정치권에서 밀려났다.

이런 바탕 위에서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킨 신군부 세력은 1980년 8월 21일,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를 통해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고, 27일 통일주체 국민회의는 기권 1명을 제외한 만장일치로 전두환을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0월 23일 국민투표를 거쳐 5공화국 헌법이 마련되었고, 27일에는 국회를 해산시키고, ‘국가보위 입법회의’를 발족시켜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마련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정치풍토쇄신 특별조치법’, ‘국가보안법’등이 개정되거나 제정되었다. 또한 신군부 세력은 민주정의당을 만들었다. 이로써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인수받기 위한 절차와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 광주학살을 딛고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

새로운 헌법에 의해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선출된 전두환은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특히 이 5공화국은 국민대중의 지지가 아닌 미국의 지지를 업고 등장한 것인데,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직전에 1981년 2월 말 미국은 그를 워싱턴으로 불러 미국의 지지를 확인시켜 주고, 4월에 부통령 부시가, 1983년 11월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지지를 확인시켜 주었다. 

이 시기에 교회는 한동안 전두환의 철권통치에서 비켜나 있었다. 주교단은 광주문제가 다소 수그러들자,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 관계로 한동안 정치적 사안에 대해 침묵을 지켰다. 더불어 전두환 정권도 교회에 대한 유화책의 하나로서, 5공화국이 출범하자마자 구성된 내각에 김기철 당시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을 체신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1981년 5월 10일에는 마더 테레사가 방한하였고, 10월 25일에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 후 주교단이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한 것은 1982년 1월 경제기획원에서 발표한 인구억제 대책에 문제점이 많으니 철회할 것을 요청하는 건의문이었고, 이어 2월 24일 인공유산과 반자연적 피임을 반대하는 사목교서를 신자들에게 보낸 것뿐이다.

한편 한국교회의 수도회 장상들은 천주교 전래 200주년(1984년)을 준비하면서 실시된 주교회의 사목지침에 따라서 1982년 4월 20일부터 22일까지 ‘현실파악 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에는 각 수도회 장상 38명이 참여하여 13명은 강원 탄광 지역인 사북, 고한, 황지, 정선에서, 10명은 서울 빈민촌인 구로, 성남, 부평(공단)에서 노동자, 도시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며, 문제를 함께 느끼고, 그들의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체험했다. 이런 활동은 이미 성남 만남의 집에서 메리놀 신부와 이영숙 소피아 수녀(포교 베네딕도 수도회), 성심 수녀회 등에서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새벽>, 1982. 7-8호 참조)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사건

광주민중항쟁 이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기점으로 비교적 정치적 발언을 삼가고 있던 한국천주교회는 1982년 4월에 또다시 전 국민의 관심의 표적이 된 사건을 맞는다. 그것은 원주교구의 최기식 신부가 광주민중항쟁과 관련되어 수배되어 있던 김현장과 부산미국문화원 방화범 문부식을 숨겨주었다고 '범인은닉죄'로 구속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광주항쟁으로 드러난 미국의 실체가 웅변적으로 폭로된 사건이다. 광주항쟁 직후 1980년 8월 8일, 주한 미군 사령관 위컴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와의 회견 중에서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치 않다”고 망언하였다. 이러한 미국 측의 시각은 12월 9일 광주 미공보관의 방화사건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한 미 대사 워커는 콜롬비아 회견에서 한국의 반체제 인사들과 시위학생들을 “버릇없는 애새끼들”이라고 재차 망언하였다.

이에 1982년 3월 18일, 고려신학교 학생 김은숙, 문부식과 부산대 최인순, 김지희 등이 부산 미문화원 현관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이들은 “미국은... 우리 민중의 염원인 민주화, 사회개혁, 통일을 실질적으로 거부하는 파쇼 군부정권을 지원하여 민족분단을 고정화시켰다. 이제 우리민족의 장래는 우리 스스로 결단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판치는 미국세력의 완전한 배제를 위한 반미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자. 먼저 미국문화의 상징인 부산 미문화원을 불태움으로써 반미투쟁의 횃불을 들어 부산시민들에게 민족적 자각을 호소한다”는 성명서를 뿌렸다.

그중 수배령이 떨어진 김은숙과 문부식은 원주교구청의 최기식 신부를 찾아왔고, 교회의 주선으로 자수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을 봄을 위하여>, 서울대 총학생회, 81-84쪽 참조)

   
▲ 1982년 발생한 미문화원 방화사건

한편 이 사건이 발생하자, 1982년 4월 2일 오후 6시, 원주 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주교관에서 <가톨릭신문>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사제의 직분”이라고 하면서 “최기식 신부는 사제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4월 3일 성명서를 발표하여 최기식 신부는 “문부식과 김은숙의 자수의사에 따라 당국에 자수를 주선해 주었으며 죄와 폭력은 미워하나 죄인은 미워할 수 없다”는 소견을 처음으로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치안본부는 4월5일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과 관련, 원주교구 가톨릭 교육원장 최기식 신부 등 모두 5명을 연행했다. 최 신부와 함께 연행된 4명은 前가톨릭노동청년회 회장이며 前산업선교회 사무국장이었던 이창복, 가톨릭 농민회 부회장 정인재, 교육원 운전사 문길환, 원주 치악산 서점 주인 이영애 등이다. 최신부는 범인은닉죄, 다른 4명에게는 국가보안법, 범인은닉 및 교사혐의등이 적용됐다.

이에 따라서, 최기식 신부의 동료 사제들은 4월12일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당국에 묻는다>는 제목으로 된 5개항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제들은 관계당국의 발표와 언론보도가 사건의 실체에 대한 진상조사와 발표보다는 천주교 신부의 범인은닉 문제를 확대선전, 발표함으로써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키고 나아가 의도적으로 천주교회를 음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이 교회 안에서 물의를 일으키자, 4월16일 CCK 사무총장 정은규 신부는 기자회견을 갖고 최 신부사건에 대한 주교단 상임위원회의 견해를 밝혔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최근 부산 미국문화원방화사건에 관한 보도를 접하면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모든 언론을 동원한 사건보도는 국민들로 하여금 가톨릭교회를 불온집단의 온상으로 오해하도록 유도하면서 마치 최기식 신부를 방화의 배후인물 또는 좌경의식화 교육의 주관자로 부각시켰다.

오늘 이 사회의 언론자유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러한 일방적인 과장보도의 저의를 묻지 않을 수 없으며 국민들 사이에 불신과 위화감을 조장해온 일련의 보도사태를 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교회를 찾아와 그 보호를 받고 있던 사람들을 본인들의 뜻에 따라 당국에 자수를 주선해준 최기식 신부의 행위는 최선의 길이었음을 우리 교회는 확신한다. 또한 광주사태로 말미암아 쫓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준 사제들의 양심을 전적으로 존중한다.

공익이나 제3자에게 또 다른 피해가 확실시되지 않는다고 양심적으로 판단되는 경우, 신앙인은 도움을 간청하는 범법행위자를 고발할 수는 없다. 더구나 광주사태는 그 진상과 원인 또는 책임의 소재가 공정하게 밝혀진 바 없으므로, 사제들은 자신들의 사제적인 양심에 따라 보호를 요청해 온 혐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양심법을 따르다 보면 국사범이나 국가 보안사범으로 몰릴 수도 있다. 우리의 순교선열들이 모두 국사범으로 처형되었고, 나찌하의 독일에서 양심법을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사범으로 처벌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국가의 소중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가 곧 국가라거나 또는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도 무너져 공산화되고 만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국가가 있고 종교가 있다'는 말에는 수긍할 수 없다. 공산주의가 두려워 모든 국민이 정부에서 시키는 말만 반복하는 사회가 된다면 그 사회는 공산독재국가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정부당국은 뒤늦게 최기식 신부 개인의 범법행위로 문제를 국한시키려 하고 있으나 사건의 경위나 성격, 그리고 사제의 신원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어느 특정개인이 아니라 교회와 사제 전체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재판을 받는다는 입장에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최기식 신부와 모든 피의자들이 올바른 법 앞에서 공정하게 재판 받는가를 예의 주시할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4월 19일 최 신부가 기소된 지 105일만에 1심공판이 끝났는데(6월 14일), 부산지법 형사4부(재판장:안문태 부장판사)는 최기식 신부에게 국가보안법위반 및 범인은닉죄 등을 적용하여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날 최기식 신부는 김현장 피고인이 광주사태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1년 10개월동안 원주교육원에서 은신시켜 주고 편의를 제공했으며, 이는 목회활동 이전에 국법에 위배되므로 처벌을 면할 길 없다고 이유를 밝혔다. 한편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 등 5명에게는 1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인권주일 : 5공화국의 양심수들을 위해

윤공희 대주교는 5.18 2주기 추도미사에서 “아물지 않은 광주사태”라는 제목의 강론을 통하여 최기식 신부 구속사건이 광주사태와 무관하지 않다고 관심을 표명한다:

   
▲ 구속된 최기식 신부
"원주교구의 최기식 신부님은 광주사태에서 피해온 김현장 씨를 보호해 준 것 때문에 구속이 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광주사태 후에, 사태 관련자라고 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조사를 받으면서 무진 고생을 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들에게 얼마나 억울하게 죄가 씌어지고 중벌이 가해졌는지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혼란과 공포의 와중에서 피해와서 보호를 청하는 사람을 사제의 양심으로 보살펴 주었다고 해서, 최신부에게 지금 범인은닉과 국가보안 사범의 혐의가 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광주사태의 진상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당시 이 사태의 내막을 세상에 밝히려다가 옥고를 치러야 했던 여러 성직자, 수도자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최기식 신부에 대해서도 같은 심정으로 그 고통에 동참하고, 그를 위해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2.5.18)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윤공희 대주교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거듭난 인물이었다. 윤 대주교는 1970년대 천주교회가 한창 민주화 투쟁에 나서고 있을 무렵, 주교단 안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윤공희 대주교는 비교적 보수적인 신앙관을 갖고 있지만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주교로 알려졌다. 또한 당시 교회 민주화운동을 이끌어가던 지학순 주교와의 각별한 연분으로 인하여 어느 편을 들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지 주교는 윤 대주교보다 10년 이상 연배였으며, 같은 성신신학교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함께 월남하였다. 그러나 광주의 참상을 목격하고 김수환 추기경이나 지학순 주교의 사회적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지학순 주교 역시 최기식 신부의 공판을 지켜보고는 <사목>에 “가톨릭과 공산주의”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교회가 용공분자의 양성소처럼 인식되는데 반박하며 최 신부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다. 

“가톨릭이 가난한 노동자, 농민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고, 정부가 잘못하는 일에 대하여 비판도 한다. 가톨릭이 노동자, 농민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용공행위라면 노동자, 농민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자들만이 일하고 있는가. 우리 정부는 노동자, 농민을 외면하고 있단 말인가... 신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에서 신을 부인하는 사람, 즉 종교를 억압하거나 양심을 부인하는 사람들, 비윤리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한다. 이들은 이론으로 신을 부인하는 사람 즉 공산주의자 같은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사목> 1982. 7월, 13쪽 참조)

그 후 천주교회는 최기식 신부의 석방과 ‘문부식 피고인을 위한 가톨릭의 구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전국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 1,231명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문부식과 김현장 피고인의 구명을 호소하는 서한에 서명하여, 29일 대구 고등법원 재판부와 관계기관에 전달했다. 이들은 서한에서 민족, 인도적 관점에 비추어 볼 때, 문 피고인 등이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간곡한 청원의 뜻을 비췄다.

이러한 큰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1982년 10월에 열린 추계주교회의는 매년 대림 제2주일을 인권주일로 정하고 인권운동을 교회적 차원에서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그 일환으로 그해 12월 5일,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인권주일'에 즈음하여 시국담화문을 발표하여 최근 몇년간 자행된 전두환 정권의 잘못을 지적하고 사목적 방침을 제시하였다.:

"국가보안법의 적용은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유신시대에 긴급조치와 반공법이 정치보복과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된 사례를 지켜보아 왔습니다. 국가보안법의 무차별 적용과 처단으로 국사범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혼동을 가져오게 하고 관제 공산주의자가 생기는 것을 우리는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신앙공동체의 활동이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처벌되는 사례를 보고,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국의 그릇된 오해와 편견으로 하여 혹심한 탄압의 위협 아래 놓여있는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의 활동에 대하여 , 깊은 성원과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인간의 지극히 고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 단체는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가 공식 인준한 단체임을 거듭 밝히는 바입니다.

인간의 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명령에 의하여 정의와 진실을 외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거나 자신의 일터와 배움터에서 추방당한 모든 사람들의 석방과 복직과 복학을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합시다. 광주사태 관련자, 5.17사태와 관련한 정치범,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수의 양심범들의 석방과 건강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 가족들을 위로합시다... 우리 교회는 인권과 사회정의에 있어서도 희망의 표적과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1982년 12월 5일, 한국 천주교 주교단)

결국 교회의 열화같은 반발로 인하여, 전두환 정권은 최기식 신부를 1983년 8월 12일, 광복절 특사로 석방시켰으며, 김현장과 문부식을 무기로 감형시켰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80년대 초반의 교회는 광주항쟁과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겪으면서 이완되었던 사회정치적 태도를 다시금 분명히 천명하고 행동에 나설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후 1987년 6월민중항쟁 과정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을 폭로함으로써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5공화국과 6공화국으로 이어지는 1980년대 전반에 걸쳐 한국교회는 점차적으로 보수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1987년 이후 교회 공식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가 유명무실화되고, 그해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교회의 노동사목이 퇴조하고, 이후 가톨릭교회의 사회참여는 비공식 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평신도 단체인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등의 활동에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교회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를 엿보기로 하겠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린다.  

[끝]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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