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9]

정교분리정책의 부활과 TK 가톨릭 정치세력의 부상 :이효상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중심제의 신헌법 아래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가까스로 승리하여 군부에 기반한 제3공화국 정권을 출범시켰다. 이는 자신의 혁명공약마저 어긴 것이었다. 박정희는 혁명공약 6항에서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고 천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들과 야당, 재야세력은 거세게 군정의 연장을 반대하고 민정복귀를 주장하였으나 결국 그 노력이 좌절되었다. 이 와중에서 교회는 다시 해묵은 정교분리 원칙을 들어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데 주저하였다. 당시 <가톨릭시보>의 기사는 교회가 기본적으로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집단의 정책에 동의하면서도 공개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음으로서 빈축을 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톨릭시보>는 1963년 3월 16일자 “정치체질 개선의 본뜻 - 우리는 전환기에 서있는가”라는 사설에서 정치 및 군사지도자들의 2.27선언은 정치체질 개선을 부르짖는 정신적 전환이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교회는 현실정치에 직접 간여하기를 극력 피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특히 공식장소에서 정치에 언급하거나 사담으로라도 교회 울 안에서 그런 것을 비친다면 좋은 표양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정치의 실제 및 사례에 대한 불간섭원칙을 명심하고 교회의 발언은 항상 원리원칙에 입각한 간접적인 기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정치풍토가 정말 바뀔 것인가에 대해 기대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참신자가 되면 우리가 가는 곳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제3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가톨릭교회는 박정권의 친영남정책의 혜택을 보게 된다.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지역감정은 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역 불균등 발전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정희는 경제개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신에 있어서도 영남계 인사들을 자신의 인적 기반으로 삼고 출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톨릭교회 안에서 장면과 한가지로 성장한 한솔 이효상이 정치적 상승일로에 서게 된 것이다.

▲이효상 씨
이효상(李孝祥)은 대구 출신으로 김보록 신부의 지도로 입교하여 해성학교, 대구고보를 거쳐 1924년 안세화 주교의 장학금을 받아 동경대 독문학과에 유학하고, 한 때, <천주교회보> 편집장도 맡아보고 <가톨릭청년>에 기고활동을 해 왔다. 또한 1952년 경북대 문리대 학장을 지냈고, 벨기에 루벵으로 유학갔다 귀국하여 1956년 9월 다시 학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가 정계에 발을 처음 디딘 것은 1960년 제2공화국 장면정권하에서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뒤였다. 5,16군사구데타 이후에 박대통령의 친영남정책으로 계속 정치적 상승세를 타고 1963년 국회의장(6-7대)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그는 민주공화당 박정권 밑에서 교회와 정권의 친화관계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실제로 천주교회와 정권이 갈등을 빚기 시작했던 1960년대 말이나 70년대에, 이효상은 몇번이나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 대통령이 만나도록 하는 계기를 주선하였다. 결국 1972년에 민주공화당 의장으로 피선되기까지 한 이효상은 우리 교회사에서 주목해 보아야할 인물가운데 하나이다.(<교회와 역사> 1990.8. 11쪽 참조)

이효상이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것은 사실상 교회역사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장면과 친화감을 갖고 성장했으며, 장면의 계보를 이은 사람은 김대중이었다. 특별히 1970년대 이후 김대중과 김수환 추기경 등 교회지도자들과 맺은 운명적 관계에서 이런 정황을 잘 알려준다. 그러나 대구교구 출신의 이효상은 당시 대구교구장인 서정길 주교의 권유에 따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고, 박정희의 선거운동에서 '지역감정'을 부추겨 박정희의 당선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계파가 없다는 이유와 선거운동 시 공로로 박정희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이요상은 그 이후 승승장구하며 영남권이 친여당 권역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역할한다.

대구교구는 전두환 신군부 집권 이후에도 일부 사제가 정권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서정길 대주교의 뒤를 이은 이문희 주교 역시 이버지 이효상의 정치적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한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던 <대구매일신문>이 대구지역의 유일한 지방지로 등록됨으로써 영남지역의 언론마저 장악하게 된다. 대구 매일신문은 대구의 조선일보라는 오명을 듣게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베트남전 파병과 군종사제단의 발전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군부정권과 군종사제단과의 관계이다. 한국교회는 해방 이후 미군정 및 국군에 대한 군인사목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효과적으로 활용해 왔던게 사실이다.

한국군에서 최초의 군종제도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1년 2월 육군본부 인사국에서 “군승과”가 설치되고 같은 해 3월 군목과로 개칭, 54년에 군종감실로 승격되는 과정을 겪었다. 초기에 육군군종 조인원 신부가 육본 이한림 장군의 협조로 육본 근처에 공장창고 1부를 빌려서 임시 육본성당을 개설하였다.(1951.4)

1955년에 다시 육본교회 낙성식이 있었으며 노기남 주교의 축하미사가 열렸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전쟁의 후유증이 가라앉자 군종사목도 침체기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1954년 12월 육군의 문관군종들에게 민간교회의 경력에 따라 중위에서 대령까지 계급이 부여되며 군종 현역시대가 개막해고, 안달원 신부는 현역 중령으로 군종차감을 거쳐, 1960년 대령으로 진급함에 따라서 차기 군종감으로 내정되었으나 5.16 군사구데타로 제대 예편되고 말았다.

그후 군사정권 아래서 조성옥 신부의 노력으로 18명의 사제가 군종신부로 임관되어 가톨릭군종단은 다시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민병권, 문중섭 장군과 한무협, 이순구 대령 등 가톨릭 고급장교의 측면 지원이 컸다. 주교회의는 61년 11월 군종신부단을 정식으로 인준하고 초대 총재로 노기남 대주교가 취임했다.


그러나 군종사제단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월남전을 통해서였다. 미국은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전쟁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였다. 1959년 2월 전면 북폭(北爆)을 개시한 후 병력과 전비를 무제한 투입하였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비의 지출로 인플레가 상승하고 달러 가치가 하락하여도 승전의기미가 보이지 않자 미국내에서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세계의 여론조차 미국을 비난하고 나서자 미국은 한국군에게 월남파병을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한국군의 전력증강과 경제개발에 소요되는 차관을 공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야당과 재야세력은 베트남 파병을 청부전쟁이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반공’을 명분으로 파병을 강행하였다. 1965년부터 시작된 파월국군은 1966년에 5만 5천명에 이렀다. 여기서 우리 병사의 피의 대가로 빚어진 인력수출, 상품수출, 군납 등을 통한 ‘월남특수’가 1960-70년대 초 외화획득의 주요한 원천이 되어 박정권에게 물적 토대를 제공한 셈이 되었다.

월남전 문제는 국내외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는 사안이었다. 박정권은 재야운동권이나 야당과 매우 심각한 갈등을 빚어 내었으며, 미국 국내에서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 천주교회는 월남전에 대하여 사실상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전체적으로 볼 때, 가톨릭 신자들은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으며, 월남전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탄이나 유태교인들에 비해 호전적이다”(「미국교회의 고민」 <사목> 1968.11 76-86쪽 참조)라는 말과 같이 미행정부의 월남전쟁을 지지하였으며, 한국 천주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국천주교회는 월남전을 계기로 한국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반공전선의 외인 지원부대 역할을 수행하고 말았다.

국군의 월남 파병(1964.10.31)에 따라 1956년 9월 17일 최창정 군종신부(육군 15기)가 최초의 파월 종군신부로 선발되어 맹호부대(포병사)에 파견되었다. 11월에 김관옥 신부는 주월 한군국 통합사에 파견된다. 전쟁 기간동안 33명의 육, 해군(해병대 포함) 군종신부들은 파월기간 1년의 원칙으로 파월되었다. 8년간 군종기간중 1965-67년 기간은 각부대의 종교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 1968-69년은 군종신부의 “월남붐”이 일어났다.

1973년 한국군 부대의 월남철수와 함께 군종신부들도 전원 귀국하였다.(최종 귀국자는 3월에 주월사의 조덕현 신부) 월남전에서 귀국한 육군 제4기 천신기, 김계춘, 송순용, 황익성, 이종관, 김용찬, 김득권 신부 및 15기 서정덕, 김옥옹, 최창정 신부 등은 군복무 7-8년의 경력 소유자들로서 이들이 군종사제단의 주축을 이루어 군인사목의 확대를 가져왔다. 이에 발맞추어 이미 1967년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10월 1일 전(前)주일을 “군종의 날”로 제정했다가 다시 10월 첫주일을 “군인주일”로 바꿔 시행하게 된다.(「한국군종사연구의 당면과제」 홍순호, <교회와 역사> 1987.11 4-6쪽 참조)

이는 정부가 강행한 월남전 파병을 통하여 교회가 군종사목을 안정화시키는 혜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사제들이 상시적으로 정권의 실력자인 군부 지도자들과 접촉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운동의 비정치화

박정권은 월남전 파병을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하면서 한편으로는 1950년대 말부터 자유당정권 이래 계속 추진되어 오던 한일 국교 정상화 논의는 5.16쿠데타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김종필, 오히라 각서 교환 이후 급진전되어 1964년 3월 정부가 한일회담의 3월 타결, 4월 조인, 5월 국회비준이라는 방침을 정하게 된다. 이에 야당은 즉각 반발하고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에 돌입하였다.

같은 해 3월 24일 서울대생은 ‘민족반역자 화형식’이라는 집회를 갖고 가두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확산된 시위는 5월 서울 문리대에서 서울시내 대학생 연합으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열려 “5월 군사구데타는 4월의 민족민주 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고 성토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반정부 시위가 1965년 2월 18일, 한일협정 비준 반대투쟁으로 이어지자, 박정권은 서울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이러한 사태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의 가톨릭운동은 자선적 행위에 국한하여 자기 운동을 전개하는 낙후된 상태에 머물렀다. 물론 이러한 모습의 이면에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정교분리원칙”, “정치불간섭주의”의 사목지침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교회는 자신의 기득권이 심각하게 훼손되지 않는한 막강한 정치권력 앞에서는 정치적 개입을 사양하고 제한 범위 안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것에 만족해 온 것이 관행이었다.

한국천주교회는 1958년에 가톨릭 노동운동단체를 표방하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창설하였지만,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교회는 처음에는 노동운동의 성격보다는 원호사업주의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1963년 노동법이 개악된데 지지를 표명했던 한국교회의 입장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쿠데타가 성공하자 숱한 입법을 단행했는 데 그중 새로 개정된 '근로기준법'을 <가톨릭시보> 사설은 지지한 것이다. 이 때, 사정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개악된 노동법을 살펴보면:

1) 1년 미만의 근무시 퇴직금지불 하지 않는다.
2) 근무자의 사망, 퇴직시 사용자의 지불 임금, 보상금 등의 청산기간이 7일에서 14일로 늘었고, 당사자 간의 합의가 있으면 더 연장할 수 있다.
3) 사용자가 사정으로 휴업할 경우에 당국의 승인을 얻으면 휴업수당을 주지 않아도 된다.
4) 휴일근무시 종전에 100%주던 수당을 50%로 내렸다.
5) 운수업 및 중요산업부문은 법정 총근로시간 범주내에서 초과근무를 시킬 수 있다.

J.O.C의 주요한 사업은 “보리싹 식당”을 운영하면서 노동자들에게 실비로 식사를 대접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이후 정부와 NCWC의 후원아래 발전하였다. 그 결과 이 사업은 1963년 5월 15일 J.O.C 서울대교구 연합회가 종로, 동대문, 문래동 등 4개 지역의 염가식당을 서울시에서 인수받아 경영하는데 이른다.

한편 1962년 6월 22일에는 ‘J.O.C 근로재건대’가 창설되었으며, 1963년 12월 24일에는 J.O.C 서울대교구연합회가 버스안내양을 위한 성탄축하 ‘웃음의 파티’를 개최하고, 1964년 11월 15일에는 식모들을 위한 일반회를 개최한다.

가톨릭학생운동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가톨릭연구회'에서 시작된 가톨릭학생운동은 초기부터 교회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기에, 창립 1주년 기념식장에는 노기남 대주교가 직접 찾아와 훈시할 정도였다. 이 모임은 발전하여 캠퍼스와 본당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발전되어 1955년에는 국제가톨릭학생운동단체인 ‘빡스 로마나’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 가톨릭학생운동은 정치적 목표와 사회개혁에 대한 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엘리트운동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신앙심 고취와 교회 안에서 학생의 위치에 대한 고민을 주로 하였다.

물론 1961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대회에서는 ‘가톨리시즘과 맑시즘’, ‘신생활운동’, ‘신자배가운동’ 등의 주제를 걸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1963년부터는 ‘지상의 평화’를 주제로 하면서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을 받아 ‘교회재일치운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1964년 전국대회 주제는 ‘그리스도교 재일치’로 잡혔다. 이 자리에 개신교 교역자들이 참석하였으며, ‘한국 그리스도인들에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왜곡된 감정과 편견, 오해, 불신을 잊고 형제인 개신교 신자 여러분과 그리스도의 근본정신을 따라 겸손과 사랑과 이해로써 대화하고 하나가 되어 조국건설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는 열린교회를 지향하는 바람직한 변화였으나 여전히 연구, 계몽, 자선이라는 엘리트주의적 활동방식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가톨릭학생>, 제 4호, 1989. 서울대교구가톨릭대학생연합회, 17-2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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