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16]

에큐메니칼 인권운동의 시작 : 크리스챤 사회행동협의회

1971년 10월 5일 원주교구 신자들의 데모를 출발점으로 경향각지에서는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10월 8일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회 산하 각 단체의 침묵데모가 있었는데, 이 협의회는 개신교와 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결성된 것이다. 이들은 가톨릭학생회관에서 박홍 신부 집전으로 ‘사회정의실현촉진기도회’를 봉헌하고 “부정과 불의, 부패를 규탄하기 위해 궐기한 천주교 원주교구의 성직자와 신자들의 의로운 행동을 적극 지지하며 우리도 함께 정의를 실현하고야 말겠다.”는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또한 참석자들은 사회의 소금이 되겠다는 뜻으로 소금을 나누어 먹은 뒤 소금이 든 플라스틱컵을 들고 가톨릭회관에서 기독교회관까지 시위하던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정치권력은 그동안 줄곧 종교세력들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종교세력을 분할통치해 왔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국회 개원식을 기독교 식으로 한다던지 성탄절을 공휴일로 정하는 등 기독교를 우대하여 친정부적 세력으로 견인하는 한편 타종교에 대한 주변화 정책을 통하여 정권에 도전할 수 없도록 하였다. 한편 박정희 정권은 불교에 대한 우대정책을 취하고 기독교 세력 가운데 정권의 통제에 응하지 않는 그룹을 무력화시키려고 하였다. 이 상황에서 1970년대에 이르면 개신교회의 진보적 그룹과 가톨릭교회의 진보적 그룹은 연대활동을 통해 열악한 조건 속을 헤치고 나갈 힘을 모아갈 수 있었다. 

1971년 ‘국가보위 특별조치법’에 대한 교회의 반응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와 저항운동이 점차 확산될 조짐이 보이는 가운데 박정희 정권은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저항세력들을 합법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모색하였다. 그 가운데 1971년 1월 20일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을 대통령 선거법 위반으로 입건하였고, 1월 28일에는 김대중 후보의 집에서 폭발물이 터졌다.

사태가 점점 비민주적 폭압정치의 양상으로 치달아가자 언론, 종교, 법조계, 학계, 문단 등 각계 저명인사 64명은 10월 19일 위수령과 휴업령 철회, 체포된 학생 석방, 부정부패의 척결, 정보정치의 폐지 등을 촉구하는 <긴급선언>을 발표하였다. 여기에는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박홍 신부, 구중서, 장용학, 박삼세, 김지하 씨 등 가톨릭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12월 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2월 21일에는 공화당이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을 국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려고 하였다. 이 법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대는 곧 반국가적 행위이며 북한과 같은 이적단체를 돕는 행위로 규정하여 무소불위의 대통령에 의한 군부통치를 강행하려는 제도적 장치였다.

▲ 김수환 추기경은 1970년대 벽두부터 유신독재의 위험성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교단은 12월 13일부터 18일까지 6일간 왜관 피정의 집에서 개최된 정기총회를 마치면서, 1972년을 ‘정의평화의 해’로 선포하고 전국 각교구와 본당에서 사회정의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이 사업을 수립하고 추진하기 위하여 주교회의 상임위원과 황민성, 지학순 주교로 ‘사회정의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에 김수환 추기경을 추대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2월 25일 성탄절 메시지를 통하여 ‘국가보위에 관한 특례조치법’의 반민주적 성격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정부에 이 법의 제정을 재고해 줄 것을 완곡하게 촉구하였다.

"... 차제에 나는 정부와 여당 국회의원 재위에게 대다수 국민의 양심을 대신해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른바 국가보위특별조치법이 국가안보상 시기적으로나 정세적으로나 필요불가결의 것이라고 양심적으로 확신하고 계십니까? ... 이 법은 북괴의 남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국민의 양심적인 외침을 막기 위해서입니까?

국민은 아직도 대통령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이 법이 대통령의 권한을 거의 절대적으로 만드는 반면에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격감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느 때보다도 대통령의 영도하에 국민이 총단결해야 할 이 난국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파국으로 몰고 갈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권은 12월 27일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특례조치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특례조치법은 계속적인 사회여론의 지탄대상이 되었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또다시 1972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비상사태 선포와 변칙통과된 보위법의 철회”를 주장하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 우리는 국민 상호간과 정부대 국민 간에 불화만을 조장하므로 전 국민의 단합에 금이 가게 하는 졸렬한 정보정치의 지양을 엄중히 요구한다. 보위법이나 정보정치는 결과적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말살시킬 위험이 크며 이는 우리와 대결된 북한공산집단에게 이익을 줄망정 우리 나라의 참된 안보에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김수환 추기경의 메시지는 또한 7.4 남북공동성명이 집권세력의 정권유지 차원이 아니라 참된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초석이 되도록 “민주주의 원칙아래 국회를 포함하여 공론에 붙여 국민들의 동의를 얻는데 정부는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하면서 정부의 통일논의 독점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8.3 긴급재정명령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욱 격화시키는 졸속한 경제정책이 될 독소가 많다”고 판단하였다.

이 메시지를 <가톨릭시보>에 게재하자 박정희 정권은 이 신문을 모두 회수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자 김경환 주간 신부는 할 수 없이 이 메시지 대신에 “예수 십자가에 처형하다”라는 특집기사로 대치하였다. 이는 마치 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교회가 예수처럼 박해받고 있다는 인상을 많은 신자들에게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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