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7]

4.19 민주혁명에 교회가 한 일이 있나?

남한은 미국의 영향권아래서 미국식의 매우 근대화된 정치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시민사회가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따라서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통제방식은 민주주의적 의회제도와 부단히 부딪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정치적 불만을 가진 대중을 대변한다는 민주당의 정치적 도전에 시달리면서도 야당의 성장을 제도적인 방법을 통하여 통제할수 밖에 없는 자유당의 입장에서는 정권연장을 위하여 엄청난 부정선거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개정, 경향신문 폐간, 조봉암 사형 등의 극약처방을 통하여 도전적 정치세력을 억압하였다. 그러나 이는 민중들의 저항과 불만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아 결국 1960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민주혁명을 촉발케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당시 민주당은 제도정치의 장에서 가장 강력한 반이승만 세력이었고, 시위를 확산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지만 혁명이 폭력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자 두려움을 느끼고 전선의 꽁무니로 후퇴하였다. 즉,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4월 19일 부터 이후 26일까지의 민주당 동태가 그러했다.(김동춘, 「민족민주혁명」,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188쪽 참조)

1960년 4.19 혁명 당시에 가톨릭교회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고 단지 부상한 학생들을 돌봐주고, 4월 23일 노두희(시몬)군의 장례미사를 노기남 주교 집전으로 거행한 것 뿐이었다. 교회가 이렇게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 것에 대하여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 (1960년 5월 8일자 사설)에서는 해묵은 ‘정교분리 원칙’을 들추어 내어 변명하고 있다.

“첫째, 모든 국가는 적어도 교회에 반항하는 정치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도우며 서로 협조해야 한다.
둘째, 모든 국법은 신법인 자연법에 거역하지 아니하는 한도내에서 제정되어야 한다.
세째, 신자인 국민에 대하여 국가명령과 교회명령이 서로 상충된 경우에 있어서는 교회명령이 국가명령에 우선한다.
네째, 국가는 교회의 초자연적인 복리를 침해하지 아니하는 한 정치에 있어서 교회의 간섭을 받지 아니한다.”


이러한 호교론의 원칙은 결국 “교회의 생존과 확장은 국가를 포함한 어떤 세상적 가치보다 우선적인 것이며, 국가가 교회를 이러한 권익을 보장하는 한 교회는 기존체제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혁명 당시에 교회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면은 4월 23일, 이승만의 하야를 종용하기 위하여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장면 회고록> 57-58쪽 참조) 그러나 이승만이 하야하고서도 혁명정부는 구성되지 않았다. 4월 25일 입각한 허정은 수석국무위원으로 과도내각을 책임지게 된다. 그는 “법과 질서를 회복하여 치안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생각하였다.”고 밝힘으로써 혁명보다는 현상유지에 급급하였다. 결국 민주당은 굴러떨어진 권력을 배분하는 데만 신경을 쓰게 되고, 권력을 독식하기 위하여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신구파 간의 갈등이 노골화된다. 그리고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유당원과 협력하여 국회해산을 요구하는 일부 사회운동세력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자유당 국회의원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결국 7.29총선거에서 민주당은 단연 압승하였으며(사회대중당, 한국사회당, 통일당으로 대표되던 혁신 정치세력은 각각 128명, 18명, 1명의 후보자를 냈으나 4명, 1명, 1명씩 당선되었을 뿐이다.), 장면은 내각제 아래서 국무총리에 취임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정권을 획득하게 된다.

▲ 민족자주통일"을 내세운 서울대생들의 4.19 1주년 시위.

민주당 정권과 교회의 반공주의 경계심 여전해.. 사회운동 규제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기 전후하여 가장 대중적으로 파급력을 불러 일으킨 대중운동은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교원 노동조합’의 결성을 둘러싼 것이었다. 교원노조운동이 폭발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교원들의 열악한 조건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나, 그 운동의 동기나 이념은 교원의 지위향상보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려는 교육자로서의 양심에 대한 압력, 교육의 민주화를 갈망하는 인텔리로서의 사명감이 크게 작용한것이다.(김동춘, 「민족민주혁명」,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198쪽 참조)

이러한 대중운동에 대하여 정권담당자들은 좌익운동의 발흥을 가져올까봐 두려워 하였다. 그 결과 장면정부는 교원노조에 대한 뚜렷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채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기류에 따라서 이들의 요구를 지연시키거나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하였다.

가톨릭교회에서도 교원노조운동을 좌익운동의 일환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소아병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가톨릭시보>는 「가톨릭 교육자는 난파한 학원의 등대가 되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하여 “요즈음 우리나라의 학원은 극도로 질서를 잃었고 이 무질서한 틈을 타서 가공할 병마가 침입하고 있다”(<가톨릭시보> 1960.6.22 사설)고 교원노조운동을 단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로자의 보호와 노사투쟁」(부제:교원노동조합운동에 대한 시비를 겸하여)라는 사설을 통하여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 등 노동권은 어디까지나 “자본가의 각성과 공권적 조치를 기다리는 동안 과도적으로 인정되는 계급투쟁”이라고 말하면서 “육체노동을 하는 자만이 여기서 말하는 노동자일 뿐 교원은 노동법의 적용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노동법 제정의 근본정신에서 제외되고 있다”고 천명하였다.

한편 1960년 11월 17일 J.O.C 기념행사에서 노기남 주교는 “우리는 노동의 정신을 절실히 깨달아 우리의 권리와 특권을 요구하기 전에 자기의 의무를 실행해야 한다.노동은 신성하다... 여러분은 가톨릭의 노동정신을 철저히 인식하고 많은 노동대중을 그리스도 안에 포섭해야 한다”고 훈화하였다.(<가톨릭신문사 史>, 267쪽 참조)

민주당 정권아래서 교원노조운동을 비롯한 진보적인 대중운동은 여러가지 방향에서 분출되었다. 8월 15일 북한이 과도적 조치로서 ‘남북연방제안’을 제시한 시점을 전후로 하여 통일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그 결과 7.29총선에서 참패한 혁신정당, 사회단체들이 민족, 자주, 통일 중앙협의회를 발족하여 통일논의를 더욱 촉발시켰다. 아울러 민주당 정권하에서 1960년 10월에 열린 ‘부정선거 관련자와 발포책임자 재판’의 결과에 분노한 시민, 학생들이 국회를 점령한 사건은 정권의 권위와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민중운동은 1961년에 넘어오면서 더욱 확산되어 크게 민주화운동, 자주화운동, 민족통일운동으로 자리잡았다. 그러자 장면 정부는 이른바 2대 악법(반공임시특레법,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경제적 발전”을 최고의 정책으로 내세웠던 민주당이 이를 해결하지 못한 채 경제적 궁핍이 심화되자 대중운동은 더욱 거세어졌다.

이러한 혼란 상황은 민주당 장면정권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정권의 반공주의적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따라서 서울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는 1961년 벽두에 「인내로서 궁핍을 이겨내자」라는 제목의 연두사를 발표하여 상황이 궁핍하고 어려움이 많더라도 천주께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정부를 믿고 기다리자고 촉구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곤핍한 모든 현상은 어디나 혁명 이후에는 자연히 따라오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곤란은 정부의 탓도 아니고 국민의 탓도 아니다. 과거 자유당 정권하에서 곰기고 병들었던 국가적 병세가 수술을 받고 파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수술이 되고 깨끗이 파종이 되면 병이 나을 때가 있을 것이니 우리 국민들은 이 파종기간에 이를 악물고 참아나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제 2공화국의 중책은 정권을 인계한 현정부라든가 입법부와 사법부의 모든 책임자들이 최선을 다하여 국리민복에 힘쓰고 있는 줄로 믿고 기다리자. 전기가 안오고 수도물이 안나온다고 정부를 욕하고 탓한들 갑자기 그 사정이 좋아질 리가 만무하다. 공연히 우리 마음만 불안하고 민심만 소동되기 쉬울 뿐이다. 참고 견디는 것이 오히려 어려운 이 난국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언정 불만불평을 외치는 것은 난국타개에 백해무익할 것 같다. 특히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오늘날 이 모든 가난과 궁핍을 국가민족을 위하여 천주께 희생으로 바치며 감수하자."(<가톨릭청년> 1961.1월호 2-3쪽 참조)


<가톨릭청년>의 질타, 장면 정부는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아..

그러나 상황이 더욱 악화일로에 돌입하자 천주교회의 일각에서는 4. 19혁명 이후 1년간의 정치적 난맥상을 진단하면서 근본적인 쇄신이 없는 한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민주주의를 희망할 수 없다는 제언이 터져나오기도 하였다. 이 글에서는 요점정리를 대신하여 박노성이 <가톨릭청년>에 발표한 「4.19혁명의 반성과 우리의 각오」라는 글을 장황하지만 소개한다:

"자유당 무법정권이 축출된 후에 이 통쾌무비한 사건을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느냐 하는데 대하여 잠시 국내에는 여론이 분분하였다... 혁명이라는 것은 어떤 낡고 부패한 이데올로기와 거기 따르는 권력에 대하여 새롭고 바른 이데올로기와 청신한 세력의 봉기로 일어나는 낡은 권력의 도괴와 신질서의 수립을 의미한다.

그러나 4.19혁명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대결이 없고 오직 비양심적 정권의 강제축출로 인한 새정권의 교체가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당에 대하여 정치적으로는 민주당이 항거하였고 나중에 마지막 치명적 일격을 가하여 자유당 정권을 넘어뜨린 것은 학생데모이었으나 냉철히 따져볼 때, 자유당과 민주당, 그리고 학생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에는 별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유당이 실정(失政)한 것은 장기집권이라는 마물에 홀려서 무법행동을 자행하였고 또 집정(執政)하는 데 비민주적 행동을 한데 있는 것으로 결코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불순한 것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 홍안의 청춘들이 희생이 된 것은 그 책임의 태반이 이승만 무법정권에 있겠지마는 또 일부는 일반 기성인들의 무정견, 무기력에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과거 자유당 시절에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자유당의 악정(惡政)때문이었지 그들의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이나 양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털어놓고 말하면 자유당 시절에 있어 여와 야로 갈리고 여에 반발한 민중이 야에 무조건 성원을 보내면서도 그 정치적 기질이나 풍토에 대해서는 양쪽에 똑같이 상을 찡그렀던 것이다. 그것이 즉, 연장선상에 이르러 4.19 이후에 있어서 정계에 여전히 불투명한 공기(空氣)를 조성하고 분열과 대립과 소음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 소위 혁명과업은 혁명 1주년이 돌아오는 오늘까지 지지부진인데다가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난관이 앞을 가로막고 정계에 여러가지 추문이 들리는 것은 옛날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어찌하여 그렇게도 초라한 난맥상을 이루게 되었는가?... 우리나라 4.19 혁명의 특질은 혁명의 주인공과 집권자가 분리되는 기현상을 빚어냈다. 즉, 혁명의 주인공은 청년학도이었으니 그들은 악정자(惡政者)에게서 정권을 탈환하여 기성 선배정치인에게 넘겨주고 그대로 학원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혁명적 기초공사도 없이 총선거를 감행하였다. 그 결과 소위 혁명신(新)국회에는 무수한 반민자(反民者)가 묻어 들어가 버젖이 혁신정치사업에 참여하였고 뒤늦게 그것도 혁명청년들의 반(半)위협으로 반민처단특별법을 마련하여 피선되어 버젖이 의석에 앉은 의원을 뒤늦게 심사처단하는 희극을 연출하였다. 뿐만아니라 무슨 까닭인지 부정축재자처단법은 민참양원(民參兩院)에서 지루스러운 공전을 거듭하고 어느 때나 결실을 보게 될른지 까마득한 현상이다.

... 그러므로 이 땅의 정치인들은 지금 당장부터 온갖 기교와 음모와 술수의 거추장스러운 가면을 벗어버리고 순수한 애국지사로 적나라한 정체를 민중 앞에 내어 놓을 것이다. 모든 기업체는 공개하여 명백하게 운영하고, 정당의 정치자금도 그 출처와 소비방법을 공개하여 양성화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정치의 특성을 모르는 말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금 우리나라의 실정은 4.19혁명을 계기로 막단길에 이르렀다. 앞으로도 여전히 낡고 부패한 정치상식으로 자유당 시절보다 일보(一步)도 진전을 보이지 못할진대 그러한 정치인은 얼마 아니하여 임종에 처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국난은 더욱 어려운 고비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 현재 이 나라에 부족한 것은 정치적 기술이 아니라 이념이다... 고관의 오직(汚職)이 속출하는 것은 민족이념이 결여된데 기인하는 것으로, 그들이 조국의 내일을 믿기 어려운 처지이므로 권력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동안에 크게 한 밑천 움켜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백방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러한 배금사상이 창궐하는 이 나라의 정신영역에 과연 어떠한 풍속을 빚어낼 것인가? 이러한 사태하에서 종교의 건전성만을 고스라니 보존할 수는 없을 것이며 또 바꾸어 생각할 때 종교의 정신적 지도력은 이러한 기회를 내어놓고는 크게 발휘된 시기가 없는 것이다." (<가톨릭청년> 1961.4월호 72-80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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