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21]

똥세례에서도 피어난 꽃 : 1977년 동일방직 사건

1977년 평화시장 청계피복노조 사건과 더불어 동일방직 사건은 가톨릭교회가 진보와 보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도 지속되는 억압 속에서 교회가 “가난한 이를 위한 선택”에 투신하도록 강제한 사건이기도 하다.

▲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농성
동일방직노조 탄압사건은 어용노조, 회사, 권력기관의 합작품이었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의 노조는 어용이었지만, 1972년 봄 대의원대회에서 단위노조로서는 한국 최초의 여성 노조지부장이 탄생함에 따라 민주노조로 발전할 태세를 갖추었다. 지부장 주길자를 중심으로 한 여성 집행부는 작은 일에서부터 권익을 찾기 시작하다가 1975년 봄 이영숙을 지부장으로 뽑으면서 회사의 눈총을 받게 됐다.

회사는 경기도 지방 노동위원회와 결탁하여 남자 종업원 고두영을 대의원 소집권자로 인정했으며, 이영숙 지부장을 구속했다. 이에 항의하는 농성을 하던 노조원들은 옷을 벗으며 저항하였으나 결국 기동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400여명의 농성자 중에 40여 명이 졸도하였다. 이로써 고두영 측은 관의 비호아래 노조를 장악, 지부장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원색적인 폭력은 회사 안팎에 충격과 파문을 던졌으며, 이에 동일방직노조 수습대책위원회는 수습대의원대회에서 1977년 4월 4일,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다시 뽑았다. 이 지부장은 JOC출신으로써 개신교의 산업선교회(인천)와도 관계를 맺으며, 노조를 독자적인 운영 방식으로 개편하기 시작하여 1978년 정기총회를 2월 21일 개최한다고 공고했다. 이에 회사의 조종을 받은 남자 직공 10여 명이 20일 정오 노조 사무실에 몰려가 선거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투표함과 사무실 집기를 모조리 부수고 노조 간부들을 난타했다. 더구나 다음날 새벽에는, 양동이에 인분을 담아가지고 나타나 이날 새벽 6시부터 투표하려던 여성노동자들의 옷, 머리, 가슴, 입, 귀 속에 인분을 뿌리는 등 한국 노동운동 사상 일찌기 볼 수 없었던 폭거를 자행했다.

이 사건은 교회가 다시금 노동자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으로 교회로 하여금 복음적 회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인권단체들이 궐기하여 1977년 4월 24일 오후 3시에 명동 가톨릭문화관에서 노동청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를 주최한 것은 전국섬유노동조합 동일방직지부이며 그 후원단체는 인권위원회,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산업선교전국연합회, 가톨릭노동청년회, 천주교전국정의평화위원회, 천주교 인천교구청, 교회여성연합회, 여성유권자 연맹 등이었다.

▲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의 똥물세례를 받고 망연자실하고 있다
1978년 3월 10일 광주대교구 남동성당에서 열린 근로자들을 위한 신.구교 합동기도회에서 원주교구 신 현봉 신부는 ‘짓밟힌 근로자들의 인권’이란 제목의 강론에서 “근로자운동을 탄압하고 노동운동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정부 자체”라고 비난하며, 동일방직 노동자문제를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이 나라에는 전체 인구의 0.3%밖에 안 되는 사람이 전 국민 소득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77년 6월 11일 노동청의 발표에 의하면 3만원 미만의 월급을 받는 근로자가 전체의 60.6%라고 합니다. 현재 정부는 3만원 미만의 저임금을 일소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3만원 이하의 근로자가 전체의 60.6%나 되는데 그것이 쉽게 일소되리라고 믿는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000불이 되는 대망의 80년대를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허리띠를 더 졸라매자고 했습니다. 국민소득이 높아야 민주주의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금년이면 국민소득도 1인당 1,000달라를 달성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생활이나 우리의 주변이 달라진 게 무엇이 있습니까. 결국 우리더러 꿈이나 먹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기는 똥도 먹고 사는 처지에 꿈이라고 못 먹고 살란 법은 없을 것입니다." 

이 무렵 J.O.C 인천교구연합회는 동일방직사건의 경위와 ‘똥물세례’를 고발하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3월에는 인천교구 사제들이 동일방직 노조원을 돕기 위한 헌금을 모금키로 하고 ‘이들을 도웁시다’라는 제목으로 사건 전모를 밝혔다.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주교단에서도 1978년 4월 8일,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는 주교단이 다시 사회문제에 공식적 입장을 밝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었지만, 그 태도는 1968년 심도직물 사건에 대해 대응했던 방식에서 크게 발전된 것이 없었다. 즉, “수많은 근로자들이 그리스도교적 정신에 따라 노동운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또는 단지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탄압을 받아 오고있을 뿐 아니라, 여러 기업체로부터 부당한 이유 아래 해고를 당하게 된 불행한 사태를 중시”한다는 표현처럼 주로 호교론적 차원에서 비롯된 성명서였던 것이다. 만일 이 사건에 교회 공식단체인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주교단은 또다시 침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를 계기로 한국교회가 다시금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주교단은 “지금까지 근로대중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을 위해서 참된 봉사를 다하지 못했음을 이 기회에 스스로 반성하고 뉘우친다. 우리자신 역시 노동자를 형제애로 충분히 아껴주지 못하였고 그들의 문제를 너무나 자주 외면하여 왔음을 깊이 자괴”한다고 반성하면서 “우리는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모든 선의의 국민들과 함께 많은 가난한 자 와 근로자들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수 있게끔 우리 자신의 마음의 회두를 위해서 기도하며 온교회가 또한 이같이 쇄신되도록 진심으로 하느님께 기원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1978년 8월 20일 기도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이제는 제발, 이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기 바랍니다. 이런 허위 날조와 조작에는 종지부를 찍기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중하고 인내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계속되면 우리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습니다. 그 허위 조작이 어떤 세력을 업고 있든지, 우리는 양심에 따라서 신앙에 따라서 행동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시 이은 해방장정 : YH 무역 노조 탄압사건

▲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YH여성노동자들
1979년 전국 섬유노조 YH무역지부를 결성한 노동자들은 작업량을 하청공장으로 돌리면서 감원을 하는 회사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임금인상과 작업조건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결국 노조에 대한 정부와 섬유노조 본부의 탄압으로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노조원 173명은 1979년 8월 9일 서울 마포구 도화동에 있는 신민당사 4층 강당에 몰려가 "회사를 계속 경영하여 우리가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진정하며 농성을 시작했는데, 경찰이 8월 11일 새벽 2시에, 1,000여 명의 기동경찰과 사복경찰을 동원하여 YH 여성노동자들이 잠이 든 사이 최루탄을 쏘며 4층 강당에 난입하여 30여분 만에 강제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YH 여성노동자 김경숙이 숨졌으며, 이들 노동자들과 신민당 국회의원, 청년당원, 취재기자 등이 경찰의 주먹, 경찰봉 그리고 벽돌 조각 등으로 난타당했고 당사의 집기가 크게 부서졌다.

노동자의 죽음마저 불러들인 이러한 노조탄압은 사회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한국 교회사회선교협의회(회장 지학순 주교)는 17일 오후 동대문성당 2층 회의실에서 성명서를 발표하여, “YH 사건은 무리한 수출 주도형 경제정책이 낳은 결과이며 부정 대출에 의한 기업 부실화와 민주적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어 발생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경찰이 이번 사건의 원인을 도시산업선교회의 배후 개입이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국민에 대해 책임 소재를 호도하고 그 책임을 도시산업선교회에 전가했다”며 정부를 비난하였다.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도 8월 20일 명동성당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당국이 가톨릭 농민회와 도시산업선교회 등 종교단체를 불순단체로 몰아치는 것을 언어도단”이라는 내용의 강론을 윤공희 대주교가 했다. 이렇게 한국 천주교와 개신교가 YH사건에 관련된 경찰의 폭력과 정부의 책임전가적 태도를 규탄하는 가운데 미 국무성은 14일 논평을 통해 한국 경찰이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을 해산하는 과정에서 “지나치고 잔인한 폭력을 사용한 것을 개탄한다”고 밝혔다. 이는 이미 박정권의 종말을 예고하는 적신호였던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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