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 -13]

이농과 과잉노동력의 착취를 통한 경제발전

1960년대 말-70년대 초엽은 한국의 정치상황뿐만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도 심화되어 갔다. 농촌의 경우에 부채농가의 비율은 1971년 전체농가의 75.7%에 달하게 되었고, 소작농가의 비율도 1970년에 전체 농가의 33.5%, 소작지의 비율은 전체농지의 17.6%로 확대되었다. 이리하여 한국경제의 중첩된 모순구조를 최종적으로 짊어진 농민들은 점차 하강분해를 거듭하여 몰락해 갔고, 살길을 찾아 해마다 50만명 이상이 도시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외자도입과 저임금에 바탕을 둔 자본의 성장논리는, 이러한 대량이농으로 인하여 도시에 광범하게 널려있게 된 과잉인구를 이용하여 저임금은 물론 노동강화와 노동시간 연장 등의 방법으로 노동자의 궁핍한 지경으로 몰아갔다. 이제 1960년대를 거치면서 광공업 부문의 노동자가 전체 취업자 중에 차지하는 비율이 1963년의 8.7%에서 1971년에는 14.2%로 크게 늘었으나, 전체 노동자의 소득이 전체 국민소득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이 1959년의 38.7%에서 1964년에는 28.8%로 오히려 줄었으며, 1960년대 말에 가서야 1959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한편 산업재해는 1964년의 1,489명에서 1969년의 38,872명으로 급증하였으며, 직업병은 전체노동자의 80% 가량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은 5.16군사구데타 이후 철저하게 금압된 상태였으며,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줄곧 관제적, 어용적 성격을 유지하였다. 그나마 노동자의 조직률은 1960년대를 통틀어 10%에 그치고, 노동쟁의 발생 건수도 103건인데 그중 67.3%가 임금인상 요구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1963년 3월 과 12월의 노동법 개정, 1970년1월 1일의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정으로 힘겨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강화도 직도직물사건.. JOC 회원 주축

강화도 심도직물사건은 교회가 불의한 사회문제에 처음으로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실천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만한 사건이다. 그 물꼬를 튼 것은 한 외국인 선교사와, 그가 조직한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동에 힘입은 것이었다.

1958년 11월에 발족한 가톨릭노동청년회는 1964년 이후 노동운동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여 1966년 1월 12일 인천 J.O.C가 발족되면서 더욱 활기를 찾았다. 그해 7월 31일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 50여명이 모여 연구회를 개최하고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J.O.C 전국지도자 훈련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가톨릭노동운동의 중요성이 재강조되었다. 그 이후 가톨릭 농촌청년회도 신설되었다.

1965년 11월 강화도 천주교회에서 전미카엘 신부에 의해 J.O.C 여자 예비팀이 발족되어 1967년 2월 강화도 심도직물에서 일하는 회원들이 활동을 시작하여, 심도직물 노동조합의 결성을 준비하기 위해 5월 14일 섬유노조 심도분회를 결성하였다.

그러자 회사측에서는 노조를 해체시키려고 회원 2명을 불법으로 해고하였다. 이에 노조원들은 강화도 성당에 모여 진상보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경찰이 출동하여 30명의 천주교 신자를 연행하였고, 1968년 1월 7일 강화도 출신 공화당 소속 김재소 국회의원과, 강화경찰서장, 심도직물 사장 등이 전 미카엘 신부를 찾아와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편 심도직물은 일방적으로 공장을 휴업시키고 그 책임을 전 신부에게 있다고 공격하였다. 더구나 강화도 소재 21개 직물회사는 J.O.C회원은 앞으로 고용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다. 이어서 회사측은 150여명의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전 신부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게 만들고, 경찰에서는 전 신부를 연행하여 사과하도록 강요하였다. 게다가 나길모 인천교구장에게 전 신부를 전임시키도록 강요하자 교회가 반발하고 나섰다.(<한국가톨릭인권운동사>, 명동천주교회, 49-53쪽 참조)

인천에서 최초로 노동문제에 대한 입장 표명

이에 인천교구 나길모 주교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이에 항의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전 미카엘 신부님은 강화도 본당 주임신부이며 본당내에 조직된 가톨릭노동청년회 지도신부로서 회원들에게 그리스도적 사회정의를 가르쳐 왔습니다. 이것은 지난 70년 동안 교황께서 선언하신 그리스도적 사회원리에 입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서신의 목적은 첫째, 여러분에게 사실을 알리고 둘째, 지난 70년 동안에 교황 성부께서 가르치신 위대한 사회정의를 상기시키고 세째, 한국 정부 당국자들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들이 노동자들의 존엄성과 노동자들의 모든 권리를 존중하여 올바른 보수와 직업의 기회균등을 누리며 방해없이 자유스럽게 노동조합을 구성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를 얻기 위하여 활약한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들의 권리 존중 등 사회정의 범위 안에서의 교회의 사회교리를 알게 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침해하는 사례에 대한 강한 저항을 표출하였을 뿐더러, 특히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로 판단하였다. 즉, 기업주와 행정관료들이 한통속이 되어 전 미카엘 신부의 전출을 요구한 것은 교회 인사권에 대한 침해로 여겨졌으며, 천주교 신자들인 J.O.C 회원들을 취업하지 못하도록 기업주들이 결의한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에 대한 도전이요,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본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발전하자 마산교구장 김수환 신부(당시 J.O.C 총재)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교회가 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정당성을 밝혔으며, 천주교 주교단은 2월 9일 교황대사관 공관에서 임시주교회의를 열어 김수환 주교의 설명을 들은 뒤 두번에 걸쳐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같은 노사문제는 비단 강화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이고도 세계적인 문제이며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을 갈라놓은 근본문제이기도 하다. 국토가 양단되고 공산주의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승공의 목표를 향하여 경제부흥을 서두르고 있는 이 때에 노사문제의 원만한 해결은 공산주의에 대한 최후 승리를 위한 첩경이라 생각하고 노사문제 해결을 위한 가톨릭 사회정책을 아래와 같이 천명한다. 

노동력의 착취는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촛점이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범하기 쉬운 자본의 횡포이므로 이를 막기 위한 노동조합의 기능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 의로 하는 이 나라의 힘이요 자랑이다.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향상과 정당한 휴식이 국가 경제부흥의 첩경이며 승공의 유일한 과정이다."(「사회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 한국천주교주교단 1968.2.9)

호교론과 반공주의 입장에서 정부의 노동정책 비판

그러나 위 성명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천주교회는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보면, 그리 발전된 것이 아니었다. 여전히 교회는 박정희정권의 승공 혹으 반공이데올로기를 답습하고 있으며, 이미 교황 요한 23세가 <지상의 평화>라는 회칙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물론적 무신론 철학과 실천적인 사회주의운동을 구분하여야 한다는 입장마저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알 수 있다. 즉, 아직도 한국교회는 호교론적 태도와 반공이데올로기를 자신의 시목방침의 중요한 잣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강화 사건은 그 기간 중에 69회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으며, 교황 바오로 6세는 국무성장관을 통하여 한국주교단에 격려와 치하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세인의 이목을 끄는 행위였으며,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당기게 하였다는 점에서 평가절하할 수 없는 귀중한 체험이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사회정의 실현과 인권운동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서두르게 된다. 1966년에 이미 한국천주교 주교단 사목교서 “바티칸공의회와 한국교회”가 발표되어 일반신자들에게도 바티칸공의회를 알리기 시작했으며, 1967년에는 <교회헌장>과 <민족들의 발전촉진에 관한 회칙>을 번역출간하였다. 그리고 1967년 7월 주교단은 “우리의 사회신조”라는 공동교서를 발표하여 정당한 공권력의 문제 노동과 분배정의에 대한 교회의 복음적 입장을 밝혔다. 교회 기관지나 언론에서도 이러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 대한 내용을 선전하기 시작했다.(1968년 3.10 <가톨릭시보> 사설 참조)

특히 1969년 10월 24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가 공동으로 ‘노동문제 대강연회’를 개최한 것은 민주화를 위한 연대성의 확보라는 차원에서 의미있는 첫걸음이 되었다. 여기에는 약 3,000명의 청중이 모였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였으며, 5개 항목의 결의사항과 ‘우리의 주장’을 채택하였다. 이 행사의 주관은 가톨릭노동장년회 전국연합회, 가톨릭노동청년회 전국연합회, 서울대교구 가톨릭평신도사도직협의회, 한국가톨릭중앙협의회 등 가톨릭운동 단체가 총망라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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