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19]

바티칸교황청의 격려

바티칸방송은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는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데 대하여 “이 재판이 공정한 해결에 도달하기를 희망한다”고 발표하였다. 바티칸방송은 특히 “지주교의 구속이 많은 나라를 경악케했으며 한국의 주교들과 가톨릭계에 우려를 야기시켰다”고 지적하였다. 한편 지학순 주교는 1974년 9월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옥중서한을 발송하였다.

"교황님! 이 곳은 호젓한 감방입니다. 그러나 저는 고독하거나 외롭지 않습니다. 조작된 죄목으로 갇혀 있고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이곳이지만 저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교회의 주교로서, 하느님과 교회와 국가를 사랑하는 하느님의 충실한 종입니다. 저는 부당한 현실을 예언자적 자세에서 고발하였습니다. 억울하게 갇혀있는 많은 정의의 투사들, 목사, 교수, 학생, 변호사, 언론인들과 함께 이곳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

결국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 그해 12월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사실이 해외에 전해지자 교황청을 비롯하여 국제사면위원회 및 세계 각 교회는 깊은 슬픔과 유감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중 가장 먼저 바티칸방송이 13일 “이 사건으로 인해 여러 종교단체에서 일고 있는 분위기는 최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수많은 철야기도회에서 입증된다”고 말하였다. 이어 방송은 앞으로도 계속 이를 주시하겠다고 하면서 “지주교에 대한 군법회의 선거공판 소식은 세계 도처에 큰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슬픔을 야기시켰다.”고 보도하였다.

▲지학순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독재권력의 정보정치에 대항하는 가톨릭교회

지학순 주교의 공판을 둘러싸고 교회 안팎이 온통 들끓고 있는 가운데 한국천주교 주교단은 <1975년 성년 반포에 즈음하여>(1974.7.5)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사목자들이 사회정의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범교회적 차원에서 교육하고 선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교권의 중심에서 발표된 것이기 때문에 사회문제에 대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정치적 참여를 당연시하는 결과를 가져와 이후 가톨릭교회의 사회정의 활동과 인권운동에 사목적 확신을 심어주었다.

"... 성년은 예로부터 '하느님을 위한 해, 인간을 위한 해, 세계를 위한 해였고, 특히 가난한 사람을 위한 해였습니다'... 때문에 교황은 '쇄신과 화해의 호소는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자유와 정의와 일치와 평화에 대한 가장 절실한 소망과 합치된다'고 천명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는 먼저 이웃 사람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또한 개인과 단체와 국가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의 기본권리를 존중해야 합니다. 때문에 사회정의를 가르치고, 사회문제 각성에 대한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며, 모든 인간의 기본권을 거듭 강조함은 교회의 의무와 책임이며,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인 주교들과 성직자들의 책임입니다.

우리들는 성년동안 모든 신부들과 전교를 담당하는 수도자, 교리교사들이 강론 혹은 교리교육시에,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회교의와 교황들의 회칙을 가르칠 것을 당부합니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주교단의 담화문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발언을 <사목>지에 기고하였다. 즉, '국민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공권력'이라는 이 글은 특히 불의에 도전하는 양심세력의 신장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정권담당자들의 사리와 아집이 아니고 민주적 양심세력의 신장이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는 부당하게도 양심세력이 봉쇄당하는 비극을 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느님이 용납하시지 않는 불의이다. 오늘 우리 크리스찬들은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자기를 바침으로써, 이 불의를 해소하는 일에 부름받고 있다."(<사목> 1975.1 )

양심세력의 신장 : 민주회복 국민회의

19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 국가협의회’가 71명의 종교계, 학계, 언론계, 재계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여기에 가톨릭교회에서는 함세웅, 신현봉, 김택암, 양홍, 박상래 신부가 가담하였다. 한편 12월 25일에는 ‘민주회복 국민회의’가 구성되어 윤형중 신부가 상임 대표위원이 되었다.

1975년 1월 6일 ‘민주회복 국민회의’의 윤형중 신부는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박정권의 퇴진을 요구하였고, 1월 7일에는 기독교 회관에서 ‘민주회복 대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월 10일 각 신문사 기자들은 언론자유를 실천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23일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유신정권을 정당화하려는 정부의 국민투표 제의를 정면거부한다고 발표하였다.

해외에서도 1월 28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서 박대통령의 국민투표를 비난하는 기사를 썼는가 하면, 2월 10일 민주회복을 위하여 국민투표를 거부하자는 공동성명이 8개 해외교포단체에 의해서 발표되었고, 2월 12일 김대중은 국민투표의 조작성과 부당성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특히 1월 6일 첫 기자회견에서 윤형중 신부는 “나는 현 정권이 중대한 선택의 시점에 서있다고 믿는다. 만약 훌륭한 정부였다면 그럴수록 퇴진의 용기와 결단을 갖는 것이 이제까지의 그것을 더욱 돋보이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정권의 보존과 유지를 탐하고 획책하는 정부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진퇴가 분명한 정부이기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한편 1975년 1월 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명동대성당에서 80여명의 성직자와 2천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인권과 민주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가지면서 <우리의 결의>를 발표하였다.

"...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암흑속에서 횃불을 높이 들고 우리의 빛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이 땅에서의 인간회복을 위해 애타게 기도해 왔고 목매어 외쳐왔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집권자에 의해서 유린되었고, 진리와 양심을 외면하고 거역하는 집권자의 죄악은 오히려 확대되고 심화되었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부되고 독재자의 말은 신성시 되며 교회는 감시당하고 독재권력은 성역화되며 신앙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박해받고 권력자의 폭력은 난무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왜곡되었으며 인간의 보편적 양심은 우리 것이 아니라 하여 권력에 의해 추방되었다."

이러한 교회내 진보적 흐름은 1975년 2월 6일 인권회복 기도회에서 명동대성당에 3,500여명의 인파 가운데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치러졌다. 이날 사제단에서는 ‘현실고발’을 하면서 인권운동을 순교의 자세로까지 끌어올렸다.

"... 우리 서울대교구 주교관은 정보원으로 들끓고 있으며 여기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도 상당 숫자가 정부기관원일 것입니다. 서울시 경찰국은 기도회에 대한 방해와 탄압을 지시로서 내려 신앙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정면으로 본격적으로 탄압하려 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참여하는 사제들은 항상 정보기관원의 감시하에 놓여 있고, 일거수 일투족이 모두 다 정보기관원에 체크되고 있으며, 전화는 모두 도청되고, 행동은 미행되며, 걸핏하면 협박과 공갈을 당하고 있습니다

... 여당의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분도 우리의 분명한 교우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가톨릭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까닭을 우리는 모르겠습니다. 현재 이 땅의 양심을 대변하고 있는 천주교회를 권력으로부터, 정보정치의 위협으로부터, 비인간 비양심의 집단의 도전으로부터, 하느님의 교회와 우리의 양심의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지킵시다. 순교의 각오를 해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 그런 각오를 해야 할 때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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