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24]

정의구현사제단과 정의평화위원회가 나름대로 1978년도 이후 더욱 가속화된 박정권의 탄압에 대한 복음적 증거에 나서는 가운데, 그 해 7월 문정현 신부와 함세웅 신부가 납득할만한 설명 없이 구속되었다. 이는 안동교구 사제단과 농민회에서 제기하고 있던 오원춘 사건에 대한 교회의 항의가 더욱 격렬해 질 것을 사전에 봉쇄하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 전주교구 김재덕 주교
따라서 전주교구 사제단과 교회단체들은 전주 중앙성당에 모여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전주 교구장 김재덕 주교가 강론에서 “현정권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을 주장하였다. 지학순 주교 등 150여명의 사제단이 공동집전하였는데 1만여명이 참석하였다. 미사후 전동성당까지 침묵시위를 벌이고 나서 가톨릭 여러 단체가 서명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이 사건으로 당국에서는 김재덕 주교의 구속여부를 검토하는 바람에 교황청 대사,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주교가 김재덕 주교와 만나 대책을 논의하고 사제들이 전주 중앙성당으로 모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교회가 정부당국과 긴박한 갈등상황에 봉착해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정치적 입장을 갖고 시위를 하는데 반대하는 사제들이 ‘교회 현실을 우려하는 연장사제 49명’이라는 명의로 <주교단에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이들 사제들은 (1) 시국문제에 대한 주교들 사이의 불일치를 통감한다면서 (2) 주교단의 결속으로 한국가톨릭의 질서와 규율을 우선적으로 확립시켜줄 것을 요망하고 (3) 사회참여에 대한 지침을 명백히 하고 (4) 성직자들의 사회참여를 비판하면서 제2선에 머물도록 조처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교회의 신성성은 비록 죄인들이 모인 교회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신성성이 투영된 교회로서 세속에 대하여 거룩한 교회의 품위를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교회마저 세속화에 합세하여 거룩하고 품위있고 고상한 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실로 개탄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오늘의 교회풍토는 주교님들에게서 그 시범이 흐려지고 있고, 사제들에게 있어서는 존경과 순종보다 비판과 저항이 앞서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는 바입니다...

1. 일치의 교회 구현을 위하여 주교님들께서 부터 일치의 시범을 주시도록 청원합니다. 교회내의 불일치가, 특히 시국에 관하여 주교단의 불일치에서 연유되었음을 통감하여 왔기에 드리는 호소입니다.

2. 주교공동성에 따른 주교단의 결속으로 한국가톨릭의 질서와 규율을 우선적으로 확립시켜주십시오. 특히 성전과 거룩한 전례의 속화, 일치를 저해하는 교회내의 탈선단체, 교도권의 인준없이 임의 남발되는 모든 성명서를 조절시켜 주십시오.

3. 교회 교도권에 대한 존경과 순종의 정신풍토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특히 상하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품위있는 교회풍토를 확립시켜 주십시오.

4. 사회참여의 교회적 한계, 교회적인 방법에 관한 교회 최고 교도권의 지침을 공개 명시하고 윤리적 가치차원에 한하여 대화의 방법을 견지하여 주시기 바라며, 성직자들은 평신도 교육이라는 제2선에 머물러 있게 하여 주시고, 사회 제일선에서는 평신도들 스스로가 복음을 증거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은 내정간섭의 오해나 마찰을 초래하지 않도록 한국인 사제 이상으로 지혜로운 최선을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5.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신풍토와,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있어서 하느님의 법이 최후의 기준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양심만을 최후 유일의 기준으로 하려는 윤리판단기준의 오류를 시정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 호소를 드리는 우리 사제들은 지속성을 띤 단체가 아니고 오로지 이 호소의 뜻을 같이하는 것 뿐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이른바 ‘구국사제단’으로 알려진 연장사제들은 주로 비인준 단체인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활동에 불만을 품고 이들의 인권활동을 교도권을 통해 저지시키려고 노력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서울교구 김창석 신부, 마산교구 정하권 신부가 주축이 되었다고 전한다. 한 기자의 기록에 의하면 이에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연장사제들의 호소문이 발표되자 류강하 신부는 홧김에 김창석 신부에게 한밤중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나 안동교구 류강하 신부요”
“누, 누구라고요...! 이 밤중에 웬일입니까?”
“신부님이 박대통령으로부터 2천만원을 받았다면서요? 사실입니까?”
“뭐라고, 당신 누구 신부라 했소? 이름 다시 대보시오!”
“사실이 아니면 됐지. 이름은 왜 다시 묻는거요...”


류 신부는 그 쯤에서 전화를 슬그머니 끊었다. (<김수환 추기경 로마에서 명동까지>,유가형, 규장각 161-162쪽 참조)

물론 김창석 신부가 실제로 박정권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결국은 교회가 불의한 정권에 타협하거나 침묵함으로써 박정희 독재정권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사회적, 신학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주교들 간의 불일치, 사제들 간의 불일치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교회가 내적 갈등 속에 빠져 있는 가운데 부마사태가 터지고, 곧이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사살됨으로써 유신 독재공화국은 파국을 맞이한다.

1970년대 가톨릭운동에 대한 마무리

1970년대는 해방이후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폭압적인 정권이 법적, 제도적 물리력과 군대를 갖고 민중을 억압하는 가운데 수많은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고 박해하던 시기였다. 이에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그리고 해방을 위한 투쟁은 십자가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교회 역시 200여년 동안 성격화되었던 “탈민족화된 이방인 교회”에서 “겨레의 심장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피를 나누는 교회”로 향한 출애급의 여정을 밟아갔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1970년대는 새하늘 새땅을 찾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단련받아야 했던 것을 기억하게 하는 소중한 체험과 빛을 던져주었다. 즉, 한국교회는 독재정권의 박해 가운데 정화되었으며, 민중복음이 선포되게 하였다.

한국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실천을 하는데 원동력을 제공하였던 신학적 토대는 당연히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이었다. 특히, 현대사회에 교회가 적응해가도록 독려하였던 <사목헌장>은 교회가 불의한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교회문헌들은 대부분 이데올로기 문제에 있어서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았고, 사회적 변형보다는 정권의 민주화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1970년대 가톨릭운동은 인권운동의 일환으로서 노동문제와 농민문제를 바라보았다.

1970년대 가톨릭운동이 인권운동의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는 문제의식은 곧 가톨릭운동이 교회의 지도층인 사제 중심으로 전개된 까닭을 일부분 설명해 주기도 한다. 인권운동이란 대체로 약자의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의 인권을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보호해 주자는 생각이 늘상 바닥에 깔려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러한 생각은 사제운동의 중심을 이루는 사람들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톨릭노동청년회’나 ‘가톨릭농민회’등은 가톨릭노동청년회 창립자이기도 한 조셉까르댕 추기경의 “신도를 선두로”라는 사상에 따라 평신도의 자발성과 주체적 의지를 강조해왔다. 이 단체들은 초기에 지도신부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해 통제되어 왔으나 1970년대 중반, 가톨릭운동이 강렬한 저항운동의 경험을 갖게 되면서 내부적 갈등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1975년 국제가톨릭노동청년회 린쯔회의에서 계급해방을 주장하는 선언이 출현하면서, 한국교회는 가톨릭운동이 사회주의 운동과 같이 급진적 개혁을 요청하고 과격한 행동에 나서는 것에 대해 의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대세가 70년대 전반에 걸쳐 진보적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

이런 소망스러운 결과를 낳은 데 도움을 준 것은 돔헬더 까마라 대주교의 <평화혁명> 등 중남미 교회의 경험이 한국교회에 던져준 충격으로 인한 완충적 효과뿐 아니라, 성염 교수가 1977년에 번역해서 소개한 구띠에레즈 신부의 <해방신학>이 던져준 문제의식이 작용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번역출간한 <자유에의 소명>(1976년 판)에서 보듯이 “자유”에 대한 열망이 독재체제를 경험하면서 너무도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 주었으므로 가톨릭운동이 보수세력의 숱한 발호에도 불구하고 꺽이지 않는 흐름을 이룰 수 있었다. 그중 위르겐 몰트만의 <해방의 신학>이라는 글 앞머리에 실린 시를 한구절 읽어보면서 마무리 하자:

"나는 알고 싶다,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길을.
나는 부숴뜨리고 싶다, 나를 얽매고 있는 이 모든 사슬들을.
나는 말하고 싶다, 내가 말해야 할 모든 것들을.
소리쳐 외쳐라, 크게 외쳐라, 온 세상이 들을 수 있도록."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