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17]

▲ 1970년 7월 18일 재판장. 시인 김지하씨가 월간지 <사상계>에 기고한 담시 '오적'이 문제되어 구속된 채 재판장에서 신문에 응하고 있다.

고행 1974... 그리고 장일담

김지하(프란치스꼬)는 1941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목포중학교, 강원도 원주중학교, 서울 중동고등학교를 거쳐 1966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대학 재학중 1966년 5월 20일 한일회담 반대투쟁 과정에서 있었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弔辭)를 발표하였으며 그 때부터 6월 3일까지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후 그는 1969년 <시인>이라는 잡지에 “서울길”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 때부터 ‘김영일’이라는 본명 대신에 ‘김지하’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 시(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 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 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 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 내 별별 이상한 도둑이야길 하나 쓰것다.옛날도, 먼옛날 상달 초사훗날 백두산아래 나라선 뒷날배꼽으로 보고 똥구멍으로 듣던 중엔 으뜸 아동방(我東方)이 바야흐로 단군아래 으뜸 으뜸가는 태평 태평 태평성대라그 무슨 가난이 있겠느냐 도둑이 있겠느냐 포식한 농민은 배터져 죽는 게 일쑤요 비단옷 신물나서 사시장철 벗고 사니 고재봉 제 비록 도둑이라곤 하나 공자님 당년에고 도척이 났고 부정부패 가렴주구 처처에 그득하나 요순시절에도 시흉은 있었으니 아마도 현군양상(賢君良相)인들 세상 버릇 도벽(盜癖)이야 여든까지 차마 어찌할 수 있겠느냐 서울이라 장안 한복판에 다섯 도둑이 모여 살았겄다.('오적' 일부)
1970년 4월 <사상계>에 “오적(五賊)”이라는 시를 발표한 것이 반공법 위반으로 걸려 6월 20일 구속되었으며, 9월 8일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72년 3월 19일 <가톨릭시보>에 김지하의 「신춘수상 경칩」 게재하여 문제가 되었다.

1972년에 접어들어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은 더욱 극심해졌다. 3월 29일 육군보안사령부는 가톨릭 시인 김지하를 1972년 교회기관지 <창조> 5월호에 실린 시 ‘비어(蜚語)’를 다시 문제삼아 입건하였다. 정부는 8월 3일 소위 ‘8.3조치’를 발표하여 영세민에게 불리한 조치를 취하고, 10월 7일 드디어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시키고,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11월 21일에는 소위 ‘유신헌법’을 만들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제 8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한편 김지하는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발표하자 1973년 11월 5일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민주수호를 위한 시국선언문‘을 많은 민주인사와 더불어 발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1974년 4월 25일 전남 흑산도에서 체포되었다.

1974년 7월 13일 비상군법회의는 김지하에게 긴급조치 제 1호와 제 4호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하였으나, 7월 20일 국방부 장관의 형확인 과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출감하였다. 당국은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김지하를 일시 석방하였으나 그가 동아일보 지상에 기고한 “고행... 1974년”의 내용과 작품구상을 위해 메모해 두었던 이른바 ‘옥중메모(장일담, 말뚝)’에 반공법을 적용하여 재투옥하고 인혁당 사건과 연루시켰다.

1975년 3월 13일 수사당국이 자택과 처가를 수색하여 압수한 옥중메모 가운데 기도문을 읽어보자:

"...몇달이 계속되는 똑같은 기구를 하느님이시여 실현시켜 주소서. 내 마음의 칼을 예리하게 하여 주소서. 통곡 속에 가슴이 찢어질망정 끊고 아득히 싸움터로 나가게 하소서. 고통만인 외로운 피투성이의 싸움의 길, 헐벗은 민주혁명으로서의 독한 삶의 길만이 나를 구원합니다. 그 고통 속에서만이 나의 시는 핏빛을 얻고 통곡과 해방에서 진실된 절규가 되나니 부디 나를 그 고통의 길로 가게 하소서. 애착을 끊어 버리게 도와 주소서. 일그러지고 병든 육신이 되어 어느 거리에선가 쓰러지리라. 그러나 내 가슴엔 한 편의 맑은 시를 품게 하소서. 내가 찾아 헤매는 것은 안락이 아니며 행복이 아닙니다. 진리의 불기둥이며, 산맥을 뒤엎는 폭풍이며, 파도입니다. 그로부터 태어날 ‘대지의 시’ 한편 내 육신을 제물로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나의 생은 성공입니다.

밑바닥에서만 저는 행복합니다. 고통 속에서만이 저는 평화롭습니다. 외로움 속에서만이 진정으로 이웃을 향한 손길이 뻗어가고 피투성이 싸움 속에서만이 참된 자비의 미소가 피어오릅니다.

아아! 나를 떠나 보내 주십시오. 나를 저 소시민적인 안락의 작은 꽃무덤 속으로, 마취 속으로 끌어들이는 유혹으로부터 끊어 버리도록 도와 주십시오. 끊어 버리고 미칠듯이 아픈 각성의 저 매운 겨울 새벽의 별빛 찬 벌판으로 보내 주십시오.

홀로 기도하고 결단하고 대중 속의 밑바닥에서 오직 이들과 더불어 상처받고, 오직 그들과 더불어 썩어 문드러지고, 그리하여 끝끝내 그들과 더불어 서로 머리를 곧추 세우고 붉은 아침의 저 대지 위에 꿋꿋이 솟구쳐 오르도록 하여 주십시오."


천주교회, 김지하 석방운동이 불붙다
"재판정은 마치 천주교 포교론장과 같았다"

김지하 시인이 구속되었으나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관심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김대중 씨 납치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평신도들의 운신에 자극받기에 아직도 성숙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 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가 김지하의 사형선고와 많은 한국 가톨릭신자에 대한 억압조치에 충격을 받아 1974년 7월 12일 기자회견을 갖고 전 세계 교회를 향하여 탄원을 간청하는 호소문을 소마(相馬)주교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일본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는 현재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심각한 인권침해에 깊은 우려를 표시한다. 지난 8월 납치된 이래 김대중에 대한 탄압조처에 우리는 같은 인류의 한사람으로서 강력히 항의하는 바이다. 우리는 인권침해에 대항한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 고통을 무릅쓴 우리의 형제들을 지지하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길 원한다. 적어도 그들의 고난에 조금은 책임이 있는 우리 국민들은 이에 매우 유감을 표시한다. 우리는 모든 인권침해에 대항할 것과 정의를 위한 세계적인 여론을 촉진하고 형성할 것을 전 세계의 교회와 선의의 국민들에게 호소한다."

그러나 1974년 지학순 주교가 김지하와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하고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현정부를 타도하려고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면서 김지하 사건에 대한 구체적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김지하 사건은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과 맞물려있는 고리였기 때문이다. 특히 1974년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을 계기로 발족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위한 애를 썼다.

이 사건에 대한 교회의 대응과정에서 우리는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정치적 입장과 사상적 변화의 성격을 관찰하는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1975년 3월 21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우리 교우 김지하 시인은 또다시 고통받고 있습니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냐 아니냐가 김지하 시인의 구속 사유였습니다. 우리는 김지하 시인이 조속히 석방되어 천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지 못할 때 권력에 의하여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관점에서 인혁당 관계 사건에 대한 흑백이 명명백백히 밝혀질 것을 촉구”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편 인천교구 최기복 신부는 “예수냐, 마르크스냐”라는 글을 통하여 김지하의 저항의식을 박해받는 순교성인들과 견주었다:

"...재판정은 마치 천주교 포교론장과 같다. 한마디로 ‘예수냐 마르크스냐’하는 재판이다. 피고의 해박한 문학적 신학적 지식에 누구나 혀를 차며 더욱 불굴의 신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법정에서 그의 태도는 너무나 뻣뻣하고 밝고 명랑하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로마 14,22)는 말씀대로이다. 또한 “행복하여라.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실감난다. 종종 우리의 선조 순교자들의 재판광경이 연상된다. 예수님께서 현재 우리나라에 사신다면 무슨 죄목으로 처형되실까 생각해 본다."(<한국가톨릭인권운동사> 242-243쪽 참조)

김지하 신앙보증운동 : 예수냐 마르크스냐?

▲ 청년 김지하
시인 김지하가 법정에서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가톨릭의 ‘해방신학’의 입장에서 학대받는 자들의 해방을 원한데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해왔기 때문에, 김지하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에서는 그의 <양심선언> 등에 나타난 사상의 신학적 감정을 예수회 상지대학 신학교수 니콜라스 신부 등에 의뢰하는 한편, 김지하의 신앙보증을 위해 국제적으로 신학자들의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구미와 제3세계에 걸친 15개국의 200여명이 호응하였으며, 김지하가 <양심선언>에 인용한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 메츠와 몰트만도 가담하였다.

일본에서는 하마오 주교(동경)를 위시한 성직자 54명이 서명하여 1974년 12월 29일에 기자회견에 공표하였다. 한편 예수회 이한택 신부는 <‘옥중메모’에 관한 감정 의견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1976.28)

"...김지하는 그의 메모와 진술에서 해방신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해방신학이란 '현재의 불의를 타파하고 하나의 보다 자유롭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여 지금 탄압받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네 운명의 주인공이 되게 하려는 신학의 한 조류'로 정의될 수 있다. 이것이 현대신학의 주류로 되어가고 있음은 물론이다. 즉 크리스찬은 자기들 형제(특별히 이 형제가 가난하고 보잘 것 없으면 없을수록 더욱 더)를 위해서 산다는 것, 철저히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세적 투신이 불가피하며 그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지하의 신학적 배경이 이러한 해방신학에 두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면 김지하의 모든 메모 또는 행위는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에서 한치도 벗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와 같은 사상의 흐름은 사회적 구원과 인간의 완전한 해방을 위해 예수와 마르크스의 결합을 시도하는 하나의 신학적 경향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시론(試論)으로서 제시되고 있을 뿐이며 또한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기계적 결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즉,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철저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는 그 사회에 대한 진단과 인식이 요청되는데 그를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과 비판방법을 채용하고 그것을 기초로 사회정의,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서 나자렛 예수의 활동모범이 채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무신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기독교가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한국가톨릭인권운동사> 244-255쪽 참조)

이 의견서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해방신학’이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회참여 논리에서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남미 교회는 메델린 주교회의(1968)를 전후하여 ‘해방신학’이라는 토착화된 민중신학의 조류가 발전되는 단계에 있었다. 이 해방신학의 관점이 신학자가 아닌 김지하를 통하여 한국교회에 수용된 것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더구나 김지하의 해방신학적 관점은 이후 한국 개신교의 민중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민중신학의 초석을 놓은 서남동 교수는 김지하의 사상에서 신학적 영감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내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1978년 3월 ‘김지하 구출위원회’가 결성되고, 김지하 수감 3주년을 기념하는 특별미사와 기도회가 있었다. 이날은 평소 그를 아끼던 문인, 친지들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 신자 300여명이 모였다. 사제단의 합동미사에서 안승길 신부는 “진정한 민주투쟁의 불꽃 속에 살고 있는 그는 비록 감옥에 있지만 그의 영은 우리와 함께 있다. 그가 버림받고 억눌린 이웃을 위해 투신했던 모습은 본연의 크리스찬의 자세이며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인권을 위해 온몸을 바치고 있는 현대의 순교자이다. 또한 그의 투철하고 강인한 복음정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불러오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김지하 구출위원회’는 1978년 12월 22일 서울 동대문성당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한 것을 필두로 하여, 그 밖에 1979년 1월 원주와 전주, 2월에는 인천, 대구, 광주, 목포, 마산, 부산 등 16개 도시에서 김지하 문학의 밤을 개최하였다. 여기서는 그 대표적인 시중 하나인 “타는 목마름으로”가 낭송되었다.:

▲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이 실린『사상계』1970년 5월호의 본문 232쪽에 실린 컷 그림. 김지하 시인의 싸인이 있으나 이 컷 그림은 실상 화가 오윤이 그린 것이다. 이 컷은 5적(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행태와 민중의 피폐상을 재미있게 담아내고 있다.
신새벽 뒷골목에
내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앟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 소리 문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 위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이러한 한국교회 진보세력의 움직임에 힘입어 한국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도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1975년 6월에 아프리카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이라고 불리는 ‘로우터스상 특별상’을 김지하에게 수여하며 “한 시인으로서, 가톨릭신도로서, 그리고 그대의 시를 통해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대의 싸움에 강력한 지지를 표명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해 왔다고 전했다. 또한 정의평화위원회는 “바야흐로 민주주의가 성취 발전되려하는 이 역사적 단계에서 시인 김지하은 세계를 향해 내세울 수 있는 ‘민주 한국의 자랑’이다. 그를 감옥에 가둔채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민주주의 새정부를 세우기에 분주해야 한다는 이 상황은 본질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고 천명하였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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