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12]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1960년대 교회 안에 유입된 가난한 신자층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를 지나면서 급격하게 교세가 확장되었다. 1950년대 신도수의 증가는 평균 16.5%에 달하였으며, 1953년 남한의 신자수가 167,000명으로 집계되었는데, 1962년에는 신자수가 539,000명으로 3배 이상 급증하였다. 1965년에도 669,348명으로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이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입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1970년 현재 신자층의 부모는 47.2%가 모두 비신자인 것으로 보아 자연증가보다는 어른이 되어 새로 입교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광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먼저 (1) 1953년 휴전 이후 전쟁 체험 세대들이 천주교에 많이 입교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의문을 다시 일깨우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외국 원조활동이 강하게 진행됨에 따라 일부 신도들의 경우는 교회를 통해 외국 원조를 받고자 천주교에 입교하는 자도 있었다. (3) 레지오 마리애를 비롯한 각종 사도적 단체들의 활동, 사도들의 전교열과 같은 것도 이 당시 교회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에 오면, 신자 성장율이 상당히 저하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1966년에 706,129명인데, 1968년에는 766,991명, 1970년 788,082명 수준에 머물렀다. 거의 자연증가율에도 못미치는 교세성장율이었다. 이에 따라서 한국천주교회 지도자들은 교세가 감퇴되는 이유를 밝혀 다시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목방향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될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런 상황에서 1969년 3월초에 내한한 미국 메리놀선교회 본부의 전교지역 사회통신국장, 죠셉 미첸펠터 신부가 사회조사를 해보라고 제안하였다. 그러자 한국주교회의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강대학교 사회문제연구소 종교사회조사단에 의뢰하여 “변천하는 한국사회에서의 가톨릭 교회의 상과 그 역할”이라는 주제로 가톨릭신자들이 종교의식조사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 조사에서 드러난 결과를 보면, 신자층의 60-70% 정도가 생산직과 서비스업종 등에 종사하는 가난한 계층임이 드러났다.

<직업별 구분>
전문직,기술직, 관리직 13.7%
사무직, 판매직 18.4%
농림, 수산, 광부, 교통, 기능공, 단순노무자, 무직 등 67.9%

<생활정도>
아주 부유 0.2%
부유한 편 1.0%
넉넉한 편 4.5%
보통 59.4%
가난한 편 27.1%
아주 가난한 편 8.1%


또한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교회의 모습도 달라져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에서 찬성이 61.9%, 반대 21.7%로 나타났다. 또한 “교우는 교우 후보자에게 투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반대는 48.6%인데, 찬성은 21.6%에 불과했다.

여기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말, 현재 교회 안에는 가난한 신자층이 두터운 데 반하여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적절한 사목방침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신자들은 이제 예전처럼 교회가 바라는대로 신자후보자에게 투표할 만큼 신자로서의 규정력을 받지 않으며 사회적 규정력을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 신자층은 교회쇄신을 바란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난한 신자층이 많다는 점은 1970년대 이후 J.O.C의 활성화 등에 힘입어 교회가 민중운동에 나설 수 있는 대중적 토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가난한 신자층 뿐 아니라 이 시기에 ‘지식인 교리반’ 등을 통하여 입교하였던 지식인들도 대다수 동의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 때 입교했던 지식인들은 그 이후 1970년대에 들어서면 교회의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세력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지식인 예비자교리반은 별도로 구성되어 윤형중 신부와 현석호 씨, 정의채 신부 등에 의해 지도되었다.

가톨릭 학생운동의 위상변화, “참여 속의 성화 ”

한편 196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축이었던 학생운동이 1964년 한일회담반대투쟁과 월남전 파병 반대투쟁의 과정을 겪으면서 5.16구데타 이후 침체되었던 국면을 타개해 나가기 시작하자 가톨릭학생운동도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다.

특히 1967년은 바오로 6세 교황이 <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회칙>을 발표함으로써 한국교회 역시 가톨릭운동이 민족의 복음화운동에 관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민족들의 발전 촉진을 위한 회칙>은 “세계사회의 발달에 있어서 ‘인간문제에 대한 전문가’인 교회는 인간개발 활동의 하인 역할을 해왔으며,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알아보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며 복음의 빛에 비추어 신앙으로 이러한 징표를 해석함으로써 분별있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델린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주교회가 열렸다. 그 결과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라틴아메리카에 토착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개방된 연대성을 토대로 하는 민중사목을 주요한 사목적 중심으로 잡고, “정의로운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사목지침이 결정되었다. 특히 이 주교회의를 통하여 중남미 교회기초공동체가 광범위하게 발전되고, 해방신학이 발전된 것은 의미있는 성과였다.

이와 같이 세계교회 자체가 민족현실에 적합한 사목형태와 가톨릭운동을 고민하는 동안, 한국의 정치상황은 무척 악화되었다.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많은 부정을 저지르자 이를 비판하며 전국 각지에서 1개월 동안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계속되었다. 이는 전국 28개 대학과 219개 고교로 확대되었고, 시위는 단식투쟁과 함께 되었다.

또한 공화당 정권은 1968년 초에 조성된 반공정세(북한 무장군의 대통령 관저 습격기도 및 미군 정보함 나포사건)를 이용하여 당시 헌법상으로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는 규정을 개정하려고 ‘3선 개헌’을 꾀했다. 이에 68년 6월부터 69년 까지 3선개헌 반대투쟁을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이 1969년 9월 여당 의원만으로 회의장에서 날치기 통과됨으로써 민주주의적 원칙은 신랄하게 훼손되었다.

이러한 국내외 분위기 속에서 한국가톨릭학생운동은 1967년 전국학연대회에서 신심 위주, 엘리트주의적으로 흘렀던 이전의 학생대회와는 다르게 그리스도인의 눈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하려고 했으며, 사회참여와 캠퍼스 내 진정한 가톨릭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결과 1968년에는 “민족주의와 저개발국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한다. 1967년 전국대회 결의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부정과 부패가 범람하여... 우리 가톨릭학생들은 사회의 각 분야에 확고한 투쟁적 이념의 기수로서... 과거 가톨릭인의 사회참여란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소극적이고 미비했으며... 이러한 각오를 거울로 삼아 영원한 질서의 창조자로서 우리의 결의를 다진다."

1960년대 말에 들어와서 ‘교회쇄신’이라는 문제는 학생사목에 대한 관계 성직자들의 관심과 지원으로 나타났다. 1969년 10-11월 뉴델리에서 아시아의 소공의회라 할만한 ‘아시아 가톨릭 학생사목지도자회의’에 참석했던 나길모 주교(당시 총연 총재주교)와 나상조 신부(총연 지도신부)는 사제들의 결의문에서 “교회가 19세기에 노동계급을 잃었듯이 현대에도 아시아 지식인들이 희망과 열망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생길 여러 위험성을 경고하고 “주교와 수도회 장상들은 학생들의 요구와 열망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교회 사목구조를 혁신하는데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대학생들이 제기하고 있는 도전에 대해 그리스도 교회의 대답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사회개혁과 빈곤타파에 아주 절실한 노력으로 그리스도의 가장 근원적인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정당해 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서 1970년 10월 19일에 학생사목지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1) 학교와 사회 속에 그리스도교공동체를 건설하며 (2) 학생 지도자 간에 친목도모와 (3) 학생사목의 제반문제들을 해결해 가기로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가톨릭학생회는 13개 교구연합회와 75개 단위대학생회를 거느린 1만여명의 회원을 둔 방대한 조직이 되었다. 이후 가톨릭학생운동은 “참여 속의 성화”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걸게 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70년 7월 24일 광주에서 제 16차 전국대의원대회가 “사회변동과 가톨릭학생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려 그간의 상황을 검토하고 사도직의 진로를 모색하였다.(<가톨릭대학생> 제3호, 1989, 서울교구 가톨릭대학생 연합회 17-3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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