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26]

군부독재의 희생양으로 선택된 광주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합법적인 정통성을 획득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유신잔재인 공화당마저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고립 속에서 다시 전국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이 짙은 각 계급, 계층의 민주화 요구를 한 지역에서 첨예하게 폭발시켜 압살시킴으로써 민주화 투쟁에 쐐기를 박고 유신체제를 반동진영에 유리하게 재편하고자 했다. 이에 역사적으로 지배세력의 수탈과 압제, 저항, 혁명, 체념과 좌절로 점철된 그리고, 군부의 제일 첫번째 제거대상이었던 김대중과 재야 및 민중들이 일체감을 형성했던 광주, 호남지방이 적격지로 선정되었다.

지배권력은 분할통치 기술상, 영남 지방은 신군부 세력의 지지 기반이라는 점, 부마사태 이후 일단 민주화운동이 잦아들었다는 점 등 지역적 성격을 고려한 것이다. 따라서 비상계엄령의 전국확대에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달리 김영삼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러한 신군부 세력의 동향은 미국과 일본에 의해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미국은 이란, 아프카니스탄, 니카라과에서 외교적으로 실패하여 카터 행정부의 제3세계 인권외교가 부정되고, 레이건 류의 보수화 물결이 드세어졌다. 따라서 10.26사태 이후 한국상황이 안정되기를 바란 미국행정부는 12.12구데타를 암묵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자 20일경 항쟁의 진압을 위해 20사단 투입요청을 승인하는 한편, 북한의 동향 운운하며 22일에는 항공모함 코럴시 호, E-3 조기경보기 등을 급파하여 신군부의 뜻대로 위기의식을 조장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5월 23일 백악관 고위정책 조정회의에서는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걸린 한국에서 군부를 약화시키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을 거라고 밝힘으로써 광주 민중학살 등 신군부의 쿠데타 기도를 지지하였다.


분노보다 슬픔이

5월 15일 “계엄철폐”와 “전두환 퇴진”을 을 요구하던 시위대가 서울역 일대를 휩쓸고 다녔다. 이날 저녁 서울역 광장에는 학생 10만, 시민 5만명이 집결하였다. 그러나 학생지도부는 “이만하면 우리의 의사는 당국에 충분히 전달된 것 같다”며 학교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실시한다고 발표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속속 체포하면서, 전국에 계엄군을 투입시켰다.

그리고 광주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 장군의 명령으로 공수부대가 5월 18일, 시위진압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화려한 휴가‘라는 1차 작전에서 ’충성‘이라는 5차 작전까지 임무를 부여받아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황을 광주교구 김성용 신부의 증언을 통해 보기로 하자:

5월 18일은 예수승천 대축일이었다. 그날 미사를 집전하던 김성용 신부가 맞이한 것은 5월 18일 광주 시내에서 일어난 참변이었다. 그가 들은 소식에 의하면 “공수부대가 시내에 투입되어 가공할 살상이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철제의 체인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선혈을 흘리며 넘어진 사람을 군화로 차고 밟았다는 것이다. 여학생, 남학생의 차별없이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발로 차고 총검으로 마구 찔렀다고 한다. 담을 넘어서 민가에 도망가는 젊은이를 쫒아가서 그러한 만행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없이 젊은이들은 포승을 지어 연행했다”는 것이다.

다음날 가톨릭센타로 가던 중 공수부대 지휘관의 명령으로 5-6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신부에게 달려왔을 때, 김 신부는 그 때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순간 나는 분노에 떨고 있었다. M16소총이라도 내 손에 있었더라면 나는 전원을 사살했을 것이다. 전율할 충동을 느꼈다. 국민의 피땀이 묻은 방위세로 무장한 군대, 외적의 침략을막으라고 주어진 총검을 이 나라의 주인인 시민에게 돌리다니... 이런 군대는 필요없다. 주인을 모르고 날뛰는 군대는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누가 이 군인들을 미치게 했는가? 국민을 살상하라고 명령한 원흉은 누구인가?"

분노한 시민들은 “계엄해제! 계엄해제! 전두환 물러가라! 민주인사 석방하라!” 며 데모를 하고 계엄군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숱한 젊은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윤공희 대주교와 사제들은 이 사태를 수습하는데 나서야 했다. 결국 23일 오후 2시에 남동성당에서 민주인사들이 모여 학생시민들이 신뢰할 수 있는 관민각계 인사로 수습위원회를 꾸리고 광주사태는 공수특전단과 계엄군의 살상만행에 대한 광주 전시민의 정당방위이며, 책임자를 처단하고 여하한 보복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8개항을 정리하여 계엄사령부에 전달하고 시민군의 무기를 회수하며 계엄군의 회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회답은 오지 않았다.


이 당시 김성용 신부가 행한 미사의 강론 요지는 이랬다:

(1) 지금 우리는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하며, 개나 도야지같이 입을 먹이그릇에 처박아 먹어야 하며, 짐승과 같이 살아가야만 합니다. 폭력과 살인을 일상 밥먹기 처럼 하는 유신잔당이 우리를 짐승같이 취급, 때리고 개를 죽이듯이 끌고가고, 찌르고 쏘았기 때문입니다.

(2) 두다리로 걷고 인간다웁게 살려고 하면 생명을 걸고 민주화투쟁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과거의 침묵, 비굴했던 침묵의 댓가를 지금 우리들은 지불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부산, 마산 사건에서 죽은 사람들은 유신괴수의 죽음으로 보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신괴수도 김재규 일당의 죽음으로 보상된 이때에 자유와 인격을 위하여 죽어간 많은 시민의 피도 보상되어야 합니다.

(4) 이제야말로 우리는 결단의 때를 맞이하였습니다. 비굴해져서 짐승같이 천한 생명을 유지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다운 민주시민으로서 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것인지.

26일 새벽 5시 30분 경이라고 김성용 신부는 기억한다. 약속을 어기고 게엄군의 전차가 시내에 다시 진입한 것이다. 광주시 부지사는 종적을 감추고 17명의 수습대책위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몸으로 전차를 막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수백명의 시민들과 함께 전차 앞으로 행진하였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양측 인도에는 착검한 계엄군이 실탄을 장진하고 시민을 경계 하고 있었으며, 양측 빌딩 2층과 옥상에도 군인들이 기관총을 내걸고 시민을 향해 발포태세를 취한다...”

결국 세단차를 타고 온 한 장군에 의해 전차는 시민들에게 등을 돌리며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의 행진이 승리한 것이다.

27일, 김 신부는 비극의 도시 광주에서 탈출하여 광주의 사실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알리기 위해 밀사로 서울에 파견되었다. 그리곤 27일 계엄군은 도시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면서 도청을 접수하였다. 그리곤 서울에서 김의기 라는 서강대 학생이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지난 25일, 투신자살했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도 조용했다. 죽음처럼...(<광주의거 자료집>,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70-78쪽 참조)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를 염원하는 윤공희 대주교

참혹한 광주의 진실 앞에서 김준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 ...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을 뚫고 나아가
백의의 옷자락을 펄럭이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불사조여
이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다시 넘어오는
이 나라의 하느님의 아들이여

예수는 한번 죽고
한번 부활하여
오늘까지 아니 언제까지 산다던가
그러나 우리들은 몇백번 죽고도
몇백번을 부활할 우리 몸의 참 사랑이여
우리들의 빛이여, 영광이여, 아픔이여
지금 우리들은 더욱 살아나는 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튼튼하구나
지금 우리들은 더욱
아아 지금 우리들은
어깨와 어깨 뼈와 뼈만 맞대고
이 나라의 무등산을 오르는구나
아아 미치도록 푸른 하늘을 올라
해와 달을 입맞추는 구나
... ...

1980년 5월 24일 성령강림 대축일 전날, 광주 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이 시인처럼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라는 사목서한을 발표하였다. 계엄군의 도청진입을 앞두고: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승천으로 천국의 문이 열리고 이제 새로운 하늘과 땅을 이룩해 주실 성령의 내림을 경축하여야 할 이 거룩한 주간에 우리 광주시민들은 역사에 없는 처참한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그 기본권이 존중되고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민주질서의 확립과 발전이 기약되고 있다는 이 시점에서 우리 광주시민들이 남다르게 바쳐야 했던 이 제물은 결코 뜻없는 희생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 시련의 진전과 결말이 어떠할런지, 우리들의 우려와 근심이 끝나지 않고 있지만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승리”라는 크리스챤 복음의 원리는 여기에서 분명히 구현되고야 말 것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1980년 5월 24일 성신강림 전날
천주교 광주대교국장
대주교 윤공희


피흘리는 십자가에 동참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광주사태의 불행한 현실을 바라보는 교회의 시각은 다양했다. 윤공희 대주교와 광주 대교구 사제들, 김수환 추기경과 서울 및 전주교구 사제들, 유학 중인 사제들과 독일교회와 국민, 그리고 다른 주교들은 제각기 책임과 위치, 시국관에 따라 행동하고 발언하였다.

먼저 주교단의 반응을 보자. 21일, 주교회의 부의장 김남수 주교와 사무총장 이종홍 신부도 광주로 내려 갔으나 교통두절로 전주에서 되돌아 왔다. 그후 주교단은 5월23일,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긴급 상임위원회를 열어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문>을 발표하였다.

이 서한문에서는 “정부, 국민도, 군도, 민간인도 자신의 입장과 견해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워서는 안된다”면서, “지금은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에 앞서 우리 모두가 조용히 이성을 되찾고 한 인간의 본연의 자세를 회복하여 남을 추궁하고 몰아 세우기에 앞서 형제의 입장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자”고 호소했다. 또한 상임위원회는 광주시민과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윤공희 대주교에게 모든 주교들이 그 쓰라린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27일 긴급회의를 다시 열어 6월 1일 주일에 ‘광주지역 복구를 위한 모금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기로 했다.

주교단의 서한문은 그들이 광주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못한 까닭도 있겠지만 광주시민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태도로는 불만족스럽다. 정부당국에 대한 책임을 묻기보다 피해당사자인 광주시민들에게 먼저 자제하고 이성을 찾으라고 권고하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6월달에 광주대교구 사제단에서 발표한 <성명서>에서 보듯이 그들은 폭도로 몰린 광주시민의 자긍심을 회복하는게 어떤 구호물자보다도 더욱 값진 것이었다.

"전라도민은 물론 양식있는 전 국민의 비통을 자아내게 하는 이 사태는 비상계엄이라는 너울 속에 정부당국의 거짓된 발표와 통제된 언론의 편향보도로 인하여 철저히 왜곡되고 있음을 광주시민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도된 국민으로부터 자업자득이었다는 비난과 질시의 눈초리를 당하고 있다. 거짓은 폭로되고 진실은 밝혀지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양심과 신앙의 충동에 따라 사태의 진상을 전 국민 앞에 발표하는 것만이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며, 이 사태로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한맺힌 광주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결정하여 아래와 같이 전국민 앞에 밝히고자 한다.

...소위 치안부재의 10일, 곳곳에 흩어진 돌맹이,유리, 최루탄 파편을 쓸어내는 시민들, 총격의 위험을 무릎쓰고 환자를 운반 간호했던 의사 간호원들, 생명을 내어 맡기며 젊은이를 보호했던 운전사들, 어느때보다도 가장 선량했던 세칭 부랑아와 버림받은 이들, 방망이를 휘든 공수대원 앞에 너무나 섧게 섧게 울어버린 어느 아낙의 따스한 마음, 파괴와 방화를 하지말자며 만류하던 우리 모든 광주 시민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폭도들의 짓이 아니다. 저들이 불순분자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불순분자와 폭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연행, 체포의 위협 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광주시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민주시민의 긍지를 마음 속에 갖지만 응어리진 마음은 풀리지 않은 채 이재민에게 처럼 보내지는 구호품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외면하고 있다.

군은 이상과 같은 한국 근래 사상 유래없는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놓고 그 책임을 광주시민에게 전가함으로써 광주시민들과 우리 국민 전체의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겨 놓았다. 더욱 그들이 스스로 저지른 잔인한 만행에 대해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한편 광주시내 통행이 허용되면서 5월 29일과 30일 양일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대구교구장 이문희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와 성베네딕도회 수련장 진토마스 신부 등이 광주 대교구청을 방문했다. 광주교구 윤공희 대주교를 만난 이들 주교와 신부들은 광주사태를 현지에서 체험한 윤 대주교로부터 그간의 사태 경위를 들었다. 한편 김수환추기경은 소요사태중 5월24일 육본군종 이억민 신부를 통해 윤 대주교에게 위로의 서한을 보내는 한편 서울대교구 인성회기금에서 일천만원을 구호금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은 1980년대 들어 처음으로 <성명서>를 발표하여 “광주 대교구 사제단이 발표한 ‘광주사태의 진상’이 진실임을 믿는다”고 천명하였다. 따라서 “당국은 정권안보를 위해서 더 이상 사실을 왜곡 허위 보도하는 현 작태를 즉각 포기하고 언론자유를 보장”해야 하며, “광주사태의 비극적 원인은 현 정부와 일부 군부의 광적인 살인행위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입장을 지지하였다. 이 성명서에 전국 교구 중에서 유독 대구 대교구 사제단 만이 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로마에 유학중인 성직자, 수도자들 마저도 “조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오히려 저희들의 마음을 조국에 더 가깝게 밀착시키고 더 깊은 연대의식을 느끼도록 촉구하고 있다”고 광주교구에 서한을 보내주었다. 그들조차도 광주시민의 항거가 의로운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어 주께서 생명을 걸고 외치신 그 복음정신이 우리나라에서도 활짝 꽃피도록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외치다 죽어간 우리 동포들의 고귀한 피가 헛되지 않고 바로 그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1980년 6월 10일)

이렇게 전 교회의 수도, 성직자들이 대부분 광주의 아픔에 동참하고 불의한 군부의 사주로 죽임을 당한 순간에도 사실상 주교단 전체로서는 애매모호한 입장만을 견지하고 있었다. 주교회의 상임위원들이 이 당시 정부에 보낸 편지를 보자:

최규하 대통령에게

... 한국 천주교회의 상임위원 주교들은 1980년 6월 2일에 광주 사건을 체험한 윤 대주교의 말씀을 듣고 몇가지 충정을 각하께 알려드리고 국민화합에 이바지 하고자 합니다.

... 시국전반에 대해서는 국가의 안보가 힘에 의한 침묵의 총화로써가 아니라 국민의 여망인 민주적 정치발전에 의한 국민전체의 화합으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6월 2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

김수환, 윤공희, 김남수, 나길모, 정진석 주교

이는 아마도 1981년 제도교회 설정 150주년 행사를 앞두고 주교회의 안에서 서로 생각(시국관)이 달랐기 때문에 절충적인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주교들은 저마다 각 교구에서 광주시민들을 위하여 시국기도회나 구호금을 마련해 주었지만 진정 윤공희 대주교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던 분은 지학순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뿐이었던 것 같다. 김 추기경은 “6.25동란 30주년을 맞이하여”라는 시국담화문을 1980년 6월 25일에 발표하였다.

김 추기경은 광주교구 사제단이나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성명서 내용과 같은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였다. 즉, 광주사태는 “광주시민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하며,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실에 따라 공명정대하게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힘에 의한 외형적 해결은 장차 국민의 화합과 단결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신군부 세력에게 예언적 경고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 “구 정권하에서나 이 당시에 민주인사들을 용공시하며 박해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정치발전을 위해 인간의 기본권 보장과 삼권분립 등 민주헌정의 확립이 요청된다”고 말하였다.


광주사태는 광주시민의 자발적 민중의거

광주민중항쟁과 관련하여 1980년 7월 16일 현재 광주교구 신부 8명, 서울교구 신부 5명(함세웅, 오태순, 장덕필 신부 등: 유언비어 유포혐의)이 구금 연행되었다. 그러자 광주교구 사제단은 주교단에 “비상주교회의를 소집하여 교회박해라고 판단되는 이 난국에 대처해 줄 것”을 탄원하였다.(7월 17일) 그러나 광주문제와 관련한 주교단의 소집은 다시 없었고, 저마다 침묵을 지키기 시작하였다. 결국 수습위원회에 참여했던 김성용 신부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라는 죄목으로 6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조철현 신부는 처음 6년형을 받았다가 1981년 3월 말 대법원 선고 후에 사면되었다.

이에 광주 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임시간사 정형달 신부)에서는 각 본당에 “5.18광주사태 사형자 구명 및 구속자 감형을 위한 서명운동 협조 의뢰”를 원하는 공문을 발송하였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의 명의로 세계 각국에도 전달되어 독일 등지에서 광범한 서명운동에 대한 회답을 받은 바 있다. 이를테면 2명의 독일주교를 포함하여 4명의 독일연방공화국 국회의원 등 수많은 저명인사들과 9,000명의 독일국민이 서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재독 작곡가인 윤이상 씨도 포함되었다. 그들이 답신한 서명서의 일부를 보자:

"우리 서부 독일 국민들은 1980년 12월만 하드라도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고 게다가 잇따른 체포를 감행당하고 있는 처사에 대하여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도 죄스런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나라 한국에 있어서 보다 값진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기에 있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고려하면서, 한국정부는 소위 국민화합과 새 시대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역시 광주사태 수감자들의 모습이 가리워진 채 말입니다."

한편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1981년 5월 19일, ‘광주사태 1주기’를 맞아 본격적으로 그동안 금기시 되어 오던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제단은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져 세상에 드러나기 마련이다.(루카 8,17)”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라 사제적 양심과 예언자적 소명을 갖고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사도 4,20)고 천명하였다.

사제단은 “5.18 광주사태는 불순분자의 책동을 받아 일어난 폭동이나 내란이 아니다. 이 사태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물리적 폭력에 항거하여 일어난 80만 광주시민의 자발적인 민중의거”라고 명백하게 규정하였다.

이어서 광주사태의 진상은 규명되어야 하며, 광주사태로 인하여 구속중인 김성용 신부와 다른 모든 사람을 무조건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김성용 신부는 1981년 8월 17일, 광복절특사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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