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 천주교 현대사-3]

1950년 6월 25일에 개시된 한국전쟁은 그야말로 해방이후 지속된 한반도 안의 좌우 이데올로기 담지 세력 사이의 갈등이 전면화되면서 치러진 계급전쟁의 모습을 띤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초기부터 숱한 정치경제 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토지개혁의 지연으로 농민들은 여전히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일제시대 이후 빈곤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회에 제출된 토지개혁법안은 거부되거나 교묘하게 변질되었으며 그나마도 파행적으로 전개되었다.

친일파에 기반한 남한 정부

정부 수립후 남한의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고 있었다. 정부 수립 1년도 안된 1949년 6월에 물가는 1947년을 기준으로 봤을 때 이미 두 배가 넘어섰고, 1950년 1월에는 세 배, 1950년 6월에는 세 배 반이나 뛰어 올랐다. 특히 쌀값폭등은 더욱 놀라웠다. 이마저 미국의 원조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다.

남한의 이승만은 일제시대의 친일계급에 기반하고 있었으나, 북한정권은 친일파들을 정부와 사회의 고위직에서 제거시키거나 그들의 기득권을 박탈했다. 따라서 이들은 북한에서 남하하여 남한정권과 사회의 고위직 일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북한에 대한 이들의 적대감은 다른 어떤 토착세력 보다 강했다.

물론 정부 수립후 남한에서는 국민들의 거센 친일파 처단 요구를 반영하여 입법부에서 이들을 처단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고 특별기구가 만들어긴 했지만, 자기 정권의 골간인 친일파들에 대한 처벌을 이승만 정권이 극력 반대하고 방해하였다.

그 결과 북한정권의 고위직에 있던 항일혁명 세력은 친일매판세력이 해방된 조국의 반쪽에서 동족을 계속 지배하고 있는 역사를 용납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북한 간의 대립은 적어도 현상적으로는 한반도,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지배에 협력했던 한국인들과 이에 저항했던 한국인들 간의 일제하 대립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요컨대 남한 민중들은 일제시대 이후의 토지 모순구조의 온존과 그것의 개혁기대의 무산, 물가의 폭등, 절대빈곤과 기아, 친일파의 발호, 정부의 무능, 점점 줄어드는 통일정부 수립의 가능성 등으로 인하여 정치적 불만이 팽배해졌다. 여기에다 이들의 불만과 저항을 조직화하고 촉발시키는 좌파혁명 세력이 지하세력으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농민뿐 아니라 진압명령을 받은 군인들 마저 가담하였다. 그러므로 토지개혁, 친일파 처단, 조국통일 등 반란세력이 내건 구호와 명분은 농민들을 자극시키는데 충분하였던 것이다.('한국전쟁의 구조', 박명림, <청년들을 위한 한국현대사>,박현채 엮음, 소나무 108-118쪽 참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김일성의 성급한 정치판단이 불러일으킨 한국전쟁은 분단의식과 남한 내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착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가톨릭교회는 이데올로기 투쟁 중심의 반공운동에서 전투적인 멸공십자군 전쟁에 직접 뛰어들게 되었다.

교회,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와 벌이는 사상전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천주교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는 6.25를 “공산주의와의 사상전”으로 규정했으며, 얼마후 대구교구 최 주교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위선적 평화의 약속으로 약소민족을 마비시키는 크레믈린의 죄악도 크거니와, 양을 가장한 일희의 아편에 중독된 동족아닌 동족이 가능한 온갖 악마적 방법을 다하여 빚어낸 참극”이라고 단죄하였다. 그 결과 전쟁을 도발한 공산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괴뢰폭권”이고, “20세기의 휘광이” 혹은 “평화의 좀”이므로 인류의 공적(公敵)이며, 언어도단의 원수로 낙인찍었다.

한편 당시 주미대사였던 장면은 7월 초 미국 NCWC의 요청으로 미국천주교인들에게 보낸 메세지에서 한국전쟁은 “反그리스도주의자와 항전하는 전쟁”이라고 선언하였다. 왜냐하면 이번 전쟁은 “또 다른 유사 종교집단”인 공산주의자들이 도발한 “천주와 교회에 대한 도전”이러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천주교회보> 1950.11. 10. 1쪽) 그러므로 이 전쟁은 “무신론 폭군에 대한 신앙자유수호의 십자군전쟁”으로 규정된다.(<천주교회보> 1953. 1.15 1쪽)

한편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1950년에 로마성년행사에 참석차 이태리와 프랑스에 방문중 전쟁 소식을 접하고 귀국하여 폐허가 된 서울을 보고는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있는 한 세계평화는 불가능하다. 이 사상을 물리치기 위하여 신자들은 궐기하라!”고 촉구하였다.

“순교의 정신으로 이 전쟁에 용약출전하라”

아울러 교회언론 매체들은 앞다투어 전쟁 예찬론까지 동원하여 신자들을 반공전선에 나가 싸우도록 독려하였다. 즉, 전쟁은 “우리 민족이 과거에 범한 죄과와 과오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천주께서 주시는 시련”이며, “인류의 게으른 잠에서 각성시키고 이를 이끌어 진지한 건설과 진보에로 향하게”하는 것이므로 “순교의 정신으로 이 전쟁에 용약출전하라”고 촉구하였다. 이 당시에 <천주교회보>에서 주장하던 전쟁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면, 그 제목으로도 격앙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말살의 신념을 갖고 남보다 맹렬히 적을 공격하라”(1951. 11. 10 사설)
“청년 학도여 군문으로 나아가라”(1950. 11. 10, 4쪽 )
“가톨릭 정신을 기조로 멸공구국의 십자군이 되라”(1951. 3. 20, 3쪽)
“무찔르려마 무찔르려마. 사탄의 대열을 무찔르려마”(1951. 1.14, 4쪽)
“싸워야지,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싸워야 한다. 공산당이 살고는 우리는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냐?”(1951. 4. 15, 3쪽)

이와 함께 한국전쟁을 통하여 군종신부제도가 등장한다. 한국가톨릭 군종신부단은 미 8군 군종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캐롤 안 몬시뇰과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죠목사는 전쟁 중인 1950년 9월 한국군 군종제도의 창설을 건의하였고, 그해 12월 정부는 특별훈령을 통하여 군종제도를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1951년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 캐롤 몬시뇰, 김동한 신부 등이 회동하여 군종단을 창설하기로 하고, 그해 2월 육군본부 인사국에 군승과가 설치되어 조인원 신부 등 10명이 군종신부로 입대하였다. 군종제도의 창설에 따라 6차에 걸쳐 모두 45명의 신부가 한국전쟁 중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전쟁이 끝난후에도 군종신부는 계속 파견되었다. 1961년 11월 한국천주교 추계 주교회의는 군종신부단을 정식 인준하였고, 노기남 주교가 초대 총재로 취임하였다.(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가톨릭대사전>, 178쪽 참조)

교황청에서도 한국전쟁 1주기를 맞이하여 1951년 6월 16일, 교황 비오 12세는 교서를 발표하여 한국민의 멸공투쟁을 격려하였다.(<가톨릭신문사 史>, 25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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