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18]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는 1974년 7월 6일 오후 4시 50분 C.P.A. 항공기편으로 귀국후 신원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기관원들에게 강제연행되어 남산 중앙정보부에 감금되어 심문을 받았다. 그러자 행방을 확인한 김수환 추기경은 7월 8일 중앙정보부로 지 주교를 방문하였다. 여기서 지학순 주교는 “나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행동으로서 학생단체들을 도와줄 목적으로 가톨릭 시인인 김지하에게 자금을 주었다. 그러나 공산단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내가 학생들을 도와준 행동은 공산주의와는 추호도 관계가 없다”고 밝혔다. 이후 교황대사까지 방문하자 박정희는 김 추기경을 면담하고 구금상태에서 풀어주었다. 그러나 성모병원에 연금상태에 있던 지학순 주교가 자신의 입장을 밝힌 성명서를 발표하자 다시 중앙정보부에 구속되었다.

▲ 성모병원(현재 명동 가톨릭회관) 성모상 앞에서 양심선언을 하는 지학순 주교(1974.7)

이후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이 1974년 7월 23일 발표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양심선언에서는 :

1.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1972년 1월 17일에 민주헌정을 배신적으로 파괴하고 국민의 의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2.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국민의 불가양도의 기본인권과 기본적인 인간적 품위를 집권자 한 사람의 긴급명령이라는 단순한 형식만 가지고 짓밟는 것이다. 이래서는 인간의 양심이 여지없이 파괴될 것이다.

3. 본인이 위반했다고 기소된 소위 대통령 긴급조치 제 1호, 제 4호는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상 가장 참혹한 기본권 유린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소위 유신헌법의 개정을 청원하거나 건의하는 것을 금지하고 그러한 청원이 있었다는 보도도 금지하며 대통령 긴급조치 그 자체에 대한 불만이나 반대의사조차 말못하게 하며 이러한 금지조항을 위반하면 종신징역 또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군법회의는 지 주교가 김지하(본명 김영일)와 민청학련에 자금을 지원하고 유신체제에 불만을 품고 현정부를 타도하려고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징역 15년형에 처했다.


진보적 사제운동의 시작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에 대처하는 기도회 가운데 1974년 8월 5일 대전교구 기도회에서 참석한 사제들은 교구들을 초월하여 사제들의 종합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데 합의하고, 9월 23일 원주에서 개최된 성직자 세미나에서 참석한 신부 300여명이 사제모임의 결성과 명칭에 합의하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이 세미나가 끝난 뒤 24일 원주 원동성당에서 사제단의 결의를 분명히 하는 기도회를 갖고 100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가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 사제단은 사제들의 총합적인 참여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교회제도상 공인된 단체는 아니었지만 가장 광범위하고 민주적인 교회조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이 결국 사제단과 주교단의 정치적 입장이 갈라지는 시점에 오면 상호 견제, 대립하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즉, 교계제도 상으로 사제들은 각기 관할주교들에게만 귀속되므로 교구와 관할자를 달리하는 사제들이 독자적이며 전국적 협의구조를 갖는다는 점이 주교들의 불만, 또는 불안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 당시 지학순 주교 구속사건이 “첫째, 우리 교회가 서 있는 곳이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지상의 여기, 이곳의 현실 한가운데라는 것, 둘째, 우리가 현실로부터 초연해지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올바르지도 않거니와 현실이 우리를 초연하도록 내버려두지도 않는다는 것, 세째,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바로 여기 이곳의 현실 속에서만 비로소 그 참된 의미를 가지며 소망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결과 1974년 8월 29일 서울교구 소장신부들은 “사제는 예언자적 입장을 지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희생해야 하며 예언자적 입장에서 현실참여에 뜻을 같이하는 신부만이라도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밝히고 9월 11일 기도회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의문 낭독과 “우리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당시 활동한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가톨릭 측에선 사제단 총무였던 함세웅 신부가 대변인이 되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의문 

1. 1974년 7월 23일 명동대성당에서 선포된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한다.
2. 대통령 긴급조치 제 2호(비상군법회의)를 즉각 해체하고 현재 투옥 중인 지학순 주교, 목사, 교수, 변호사, 학생 등을 즉각 석방하라.
3.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인간존엄성과 기본권이 보장될 때까지 우리 사제단은 주교단 사목교서 내용을 준수하며 사태의 진전을 예의주시하면서 기도회를 계속한다.
이러한 우리의 결의는 곧 그리스도의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한 사명 완수의 길임을 확신한다.


그 이후 사제단은 제1 시국선언(9.26), 제 2 시국선언(11.6), 사회정의 실천선언(11.20)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 하느님 나라는 굶주림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결핍과 수요를 만족시켜주는 기적일 수 없다. 공갈과 협박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스스로의 자유와 존엄성을 비굴하게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신성불가침의 생존권을 부여하셨다. 그러기에 생명을 위협하고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면서 불의를 강행하는 자는 그가 개인이든 국가이든 모두 하느님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정치적 권력행사로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기존 정권도 하느님 나라의 이름과 기준에 따라 비판받아야 하며 여기에는 그 합법성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어떠한 민주정권도 면제될 수 없다. 다른 한편 교회가 하느님 나라와 그 실현을 위함이라는 명목으로도 정권에 대한 야욕을 가질 수 없다는 것도 같은 이유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의 국무총리(김종필 - 편집자 주)가 합법적 민주정부라는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명목만으로 현 정부를 비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겠다고 발언한 것은 신앙을 침해하는 월권이다. 차제는 우리는 이에 엄중히 항의하는 바이다...(「사회정의 실천 선언」 1974.11.20)

▲ 1974년 11월 6일 인권회복기도회

1970년대 초반 가톨릭교회 인권운동의 성과와 한계

한국천주교회는 1960년대 후반부터 진보적 의미의 사회참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이러한 운동은 교회가 어머니요 교사로서 행하는 양심적이고 의례적인 차원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회적 권고를 행하는 것이었으며, 항상 교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적 존재라고 스스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교회가 정권의 박해로부터 면죄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교회 역시 정치적 선택을 강요받았다. 호교론적 관점에 길들여져 있던 교회는 당연한 결과로서 지 주교의 구속을 교권침해라는 차원에서 반응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태어난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사제운동은 호교론의 울타리를 훨씬 벗어난 자주적 발전이었다. 사제들은 교계제도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양심적으로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들만의 조직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아직은 충분히 교권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단순한 교도권의 권고에 머무르지 않았다. 결의를 다지는 시위에 사제들이 앞장섰으며, 뜻있는 평신도들과 성스런 제복을 입은 수도자들이 이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 유니폼의 기도와 행렬은 교회에 대단히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또한 사회에 봉헌하는 직책으로서의 수도자의 진정하고 새로운 의미를 던져주었다. 1970년대 이후 법정에서, 감옥의 정문 앞에서, 기도회의 현장에서, 그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니폼의 성스러움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특히 사제들은 1970년대 역사의 현장에 참여함으로써 그들 자신도 다른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보복받고 탄압받으며 더욱 혹독한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아가 사제단의 결성과 그 활동은 대외적으로 특히 형제교회인 개신교회와의 단결과 일치된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1974년 11월 5일 개신교 지도자 60여명이 ‘그리스도인협의회’를 구성하고 유신체제의 철폐, 민주주의의 회복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1975년 3월 20일, 개신교 목사들 200여명은 ‘사회 정의구현 성직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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