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 현대교회사-25]

한 독재자의 죽음

1979년 10월 26일, 지난 18년간 독재정권의 칼날을 마음대로 휘둘러대던 박정희 정권은 지배권력의 분열로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민중들이 열망하던 민주화의 봄이 겨울바람을 거슬러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 어느 세력보다도 강력하고도 끊질기게 유신독재에 저항하던 한국천주교회도 나름대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며 민주국가의 재건에 남은 힘을 쏟았다.

10월 27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교회는 각종 외부행사는 연기하거나 취소하고 전국 각 성당에서는 고인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비는 미사들 드렸고,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모든 신자들에게 고인을 위해서 또 우리민족이 당한 어려움을 잘 헤쳐갈수 있는 지혜를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당부했다. 이는 천주교회의 성숙한 일면을 엿보게 한다. 박정희, 그가 독재자라 해도 한 인간으로서 죽을 때, 어찌 불쌍한 존재가 아니랴!

이 당시 로마에서 열리는 추기경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중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회의 참석을 포기하고 31일에 급히 귀국했다. 故 박정희의 국장은 11월 3일에 거행되었고 가톨릭측 고별예식은 김수환 추기경이, 그리고 무덤에서의 안장식은 윤공희 대주교가 맡았다. 청와대에 마련된 빈소에는 많은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분향을 했다.

민주헌정의 회복을 위한 교회의 건의

이후 국정은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 과도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어 나라전체가 앞으로의 귀추를 눈여겨 보면서 잠잠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한국 천주교를 대표해서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주교회의 의장), 김남수 주교(주교회의 부의장)가 최규하대통령 권한대행을 11월 24일에 방문하고 지금은 무엇보다 국민화해가 시급한 때라 하고, 이를 위해 구속인사들의 석방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이의 조속한 실현을 건의했다. 천주교회는 70년대의 현실참여적 행동만큼이나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것이다.

더불어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 위원회’에서는 11월 6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인권 및 시국에 관한 건의서>를 공한으로 발송했다. 이는 10.26사건이래 가장 처음으로 시국문제에 대하여 공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정평위는 이어 11월 28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과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 <정의로운 헌정구현을 위한 우리의 견해>라는 공한 형식의 성명서를 발송하여 “민주화에 관한 모든 일정을 분명하고 신속하게 국민앞에 공개하라”, “부정부패, 민주과오자는 일체의 공공 직위에서 물러나 철저히 자숙해야 한다”는 등 5개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상황판단이 어려운 시국에 처하여 '건의문' 이상의 적극적인 행동은 가급적 삼가하고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서울대교구의 경우에, 11월 19일 오후 2시 교리 신학원에서 열린 ‘사제 총회’에서 구속되어 있는 함세웅 신부의 석방에 대한 사제들의 의견을 모으고, 이를 알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의견이 나왔다. 이 발언에 대해 김 추기경은 현 시국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짧게 피력하고 “지금은 국민 모두가 상황을 관망하며 조용히 있는 것이 좋다. 너무 성급히 행동하면 혼란을 가져올 수 있고, 잘못하면 옥에 갇혀 있는 이들을 더 고생시키게 된다. 지금은 누가 나서도 어려운 시기이며, 우리모두가 정부의 공약을 믿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는 계엄령 아래서 사태가 어떻게 발전될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함으로써, 이때까지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복역중인 사람들이 모두 풀려나게 되어 함세웅신부, 문정현신부, 정호경신부, 오원춘씨, 정재돈씨, 김태호씨 등 성직자 평신도들도 모두 석방됐다.

민주개헌운동으로 시작하는 1980년대 교회의 서막

그러나 1979년 신군부 세력들에 의한 12.12사태는 정국을 어둡게 만들었다. 군부내 강경파가 최규하 대통령 및 군부 온건파의 정치적 입장에 불만을 품고 군부독재의 연장을 위한 쿠데타를 모의하여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를 예감하였던 것일까? 1980년대 벽두에 김수환 추기경은 “80년대를 맞아 대오각성 해야”라는 교구장 신년사를 통하여 1970년대 교회의 인권운동을 정리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더 깊은 투신을 위해 우리의 고난을 드러내자고 말한다. 이는 1970년대 가톨릭운동이 전면적인 교회의 투신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자책이기도 했으며, 아울러 교회와 민중이 겪을 고난이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70년대가 드디어 저물고 시대의 새아침이 밝아옵니다.
지난 10년간 교회가 걸어온 길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를 표현한다면 교회는 '사회속의 교회'로서의 사명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사회의 상류층, 부한 사람들과 권력있는 사람들 속에서 시작하지 않고 빈곤과 병고 등으로 사회의 밑바닥까지 밀려난 사람들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생은 단지 사람이 되어 오시는 데에 그칠 뿐 아니라, 인간의 가난과 비참, 죄와 죽음의 심연에까지 깊이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이 강생의 연장이어야 합니다 '사회속의 교회'란 단지 사회와 섞여 있다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설수도 없고, 소리조차 낼 수 없을만큼 약하고 버림받은 사람들, 억압된 사람들의 속에까지 교회의 사랑의 손길이 사실상 미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지난 10년간 이 강생의 신비를, 이 복음의 기본정신을 깊이 묵상하고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언저리에서 서성거렸을 뿐이라고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가난과 박해를 당하시며 구세사업을 완수하셨듯이 구원의 은혜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하여 교회도 같은 길을 걷도록 불린 것'(교회헌장 8)을 더 깊히 인식해야 합니다.

80년대를 맞으면서 교회가 가야할 길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우리의 삶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습니다. 형제를 위한 사랑에서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바치신 그 그리스도의 모습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리상으로나 말로만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사실상 이 시대에, 이 역사 속에 그리스도의 몸일진대, 우리에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이같은 고난이 드러나야 합니다...

오소서 성신이여
당신의 은총, 당신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하여 주소서,
또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삼아
이땅, 이 겨레안에
당신의 사랑,
당신의 정의,
당신의 진리가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게 하여 주소서." (<새벽> 1980년 1월호 참조)

1980년대에 들어서자 군부내 쿠데타로 인한 안개정국 속에서 국민들은 모두 헌법개정 작업에 관심을 모았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로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한국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는 1980년 1월 16일, 헌법개정작업에 대한 의견으로 인간본성과 자연법적 진리에 입각한 5개항을 원리적 요소로 제시했던 것이다. 정평위는 <헌법개정을 위한 원리적 건의>에서 현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제도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제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개정헌법은 억제할 수 없는 인간기본권과 정의에 입각한 화해 및 평화의 원리가 반영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새 헌법은 (1) 전문에 민족통일을 위한 강인한 의지를 표방하고 (2) 인간존엄성 보장을 위해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는 법률적 제한을 설정할 수 없다”는 명문규정을 삽입하고 (3) 대통령의 비상대권발동은 불가피한 경우라도 남용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국정감사권의 부활과 사법권의 독립으로 3권분립의 정치형태가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하며 (4) 공무원과 군의 정치적 중립을 엄격히 규정함으로써 평화적 정권교체 원칙을 설정하고 (5) 사회정의 개념을 도입하여 양적 팽창에 치우쳐온 경제성과를 재고, 소득의 공정한 분배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그동안 유신정권아래서 자행된 비민주적이고 반민중적인 군부독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민주화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법적 요구였던 것이다.

신군부 세력은 적어도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독재의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 1980년 2월 18일, 김수환 추기경은 개헌등 정치문제와 안보문제등 중요국가 정책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한 국정자문위원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던 것이다. 전직 3부요인과 사회각계 원로 23명으로 구성된 국정자문위에서 다른 3명의 종교계 지도자와 함께 위촉된 김수환 추기경은 2월 중순경 정부로부터 자문위원 위촉을 교섭받고 이를 수락했다. 이때 종교계 대표로 불교 조계종 종정 윤고암 스님과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회장 김해득 목사, 천도교 이영복 교령 등도 함께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됐다.

이어 3월 13일 발족을 본 정부의 ‘개헌심의위원회’에 가톨릭 대표로 주교회의 부의장이며 수원교구장인 김남수 주교가 위촉됐다. 각계 인사들로 구성하여 국민투표에 부칠 개헌안을 만들 ‘헌법개정심의위원회’는 모두 68명의 위원으로 구성했는데 김주교는 3월 14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열린 첫 회의에 참석했다.

계엄철폐, 유신잔당 퇴진 시위의 격돌

그러나 강경파 신군부 세력은 물밑 작업을 통하여 유신체제의 재창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0년 벽두에 이미 최규하 정권은 강경소장파의 압력을 받아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검토중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는 '군부에 의해 감독을 받는 민간정부'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헌법개정에 민주화의 기대를 걸고 있던 민중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학생들의 경우에는 5월 2일 1만여명이 서울대학교에 모여 “민주화대총회”를 열고 전면적인 정치투쟁의 개시를 선포하고 전국적인 가두시위에 동참하였다.

이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 주교단은 5월 6일부터 9일까지 춘계주교회의를 열고 80년 들어 처음으로 시국에 대한 담화문을 발표했다.

주교단은 담화문에서 “오늘의 우리시국은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중대한 고비에 서있다”고 하면서 “현 시국은 아직도 개선할 조짐이 불투명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전제하고, 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존중하는 민주헌정 수립에 있다고 강조했다. 또 주교들은 “민주화 작업이 구체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이때에 과거 민주화 대열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이들중에서 어떤 이들은 아직도 완전히 석방, 사면, 복권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며 새 민주헌정의 기초를 이루어야 할 인간존중과 국민적 화합을 위해서도 이들의 석방, 사면, 복권이 조속히 실현되기를 촉구”했다.

또한 “정부는 국민의 높은 질서의식과 애국심을 인정,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언론자유를 비롯한 민주정치를 속히 정착시키는 것이 현 시국의 불안을 해소하는 첩경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적 단합을 위해 우리 모두는 회개의 정신과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살자”고 촉구한 담화문은 “과거의 정치적 과오에 책임의 일단이 있는 인사들은 민주발전 과정에서 최대한의 겸허와 자숙이 요망된다”고 밝혔다. 이는 최규하 정권이 헌정을 지연시키고 다시금 군부독재를 자행할 위험이 있다는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그래서 계엄령을 철폐하고 유신잔당들이 퇴진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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