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22]

농민들의 자주적 조직, 가톨릭농민회

‘가톨릭농민회’는 1970년대 중반 이후에 침체해가던 가톨릭교회의 인권운동을 다시 불지르는 원천이 되었다. 가톨릭농민회는 “농민문제의 해결활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농민들의 자주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1964년 가톨릭노동청년회 농촌부가 만들어지면서 태동하였다. 이 농촌부는 1966년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로 발전하여 “농촌청년들을 그리스도적인 정신에 따라 교육함으로써 농촌청년들 자신의 생활과 환경을 그들 스스로 변화시켜 가자”는데 활동의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농촌청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자각하도록 돕는 신앙교육, 협동교육, 기술교육을 통해 농촌청년의 지도자적 자질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1967년에는 계획사업으로 야학과 협업양계를 추진하였고, 1968년에는 신용협동조합운동과 협업양돈장을 비롯한 협업농장운동을 전국본부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농민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1971년, ‘한국가톨릭농민회’로 명칭을 바꾸고 “농민의 경제적 정의실현, 농민의 사회적 지위향상, 전체 농민의 단결과 공동활동을 위한 조직강화 및 확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농민문화의 재창조와 공동체적 삶의 실현”이라는 구체적 활동목표를 공동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1973년에 경기연합회, 전남연합회가 결성되었고, 76년에는 6개도에 걸친 연합회가 생겼다.

1975년 한국천주교 주교단 춘계총회에서 가톨릭농민회의 육성을 각 교구에서 지원하기로 하고, 9월에는 각 교구별로 지도신부단이 결성되었다. 1976년 주교단은 춘계총회에서 이를 교회 공식단체로 인준하였다.

▲ 1978년 4월 북동천주교회 구내마당에서 고구마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단식중인 농민들. 밤에는 교리관에서 이슬을 피하고 낮에는 멍석에 앉아 시민들에게 홍보전을 펼쳤다.

1976년 함평 고구마 사건

함평군은 전남에서 해남, 무안군과 함께 고구마 주산지로서 매년 약 20,000여톤의 고구마를 생산한다. 그런데 1976년의 경우에는 예년보다 많은 약 25,000톤이 생산되었다. 이처럼 많은 양의 고구마를 생산하고 있지만 이 곳 농민들의 걱정은 어떻게 제 값을 받고 파느냐가 문제였다. 그런데 다행히 농협이 1976년산 고구마는 전량을 수매한다고 7월부터 농민들에게 널리 선전하였다. 따라서 11월 출하기를 맞아 농민들은 예년과 같이 농협의 지시에 따라 농협이 내어 준 포대에 고구마를 담아 운송하기 편리한 도로변에 야적시켜 두었다. 그러나 산발적으로 일부 소량만을 수매해 가고 전량 수매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농민회 전남지구연합회는 1월 31일 오후 2시, 광주가톨릭센터에서 대책협의 모임을 갖고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시국기도회를 전개하였다. 전남지구연합회는 4월 22일 '함평 고구마 피해보상을 위한 농민을 위한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이 기도회는 600여명의 회원과 성직자 기타 관련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 대주교의 주례로 개최되었다. 그러나 기도회를 마치고 농협 도지부장을 면담하러 가는 길을 경찰이 차단하고 농민들의 행진을 막았다.

이 문제는 전국차원에서 확대되어 가톨릭농민회 전국지도신부단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오늘날 가톨릭농민회의 사명은 농민의 구원과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서 절실하며 한국교회의 농촌사회 복음화운동 바로 그것임”을 재천명하였으며, “이 운동을 통해 농민의식을 일깨우고 자각된 농민공동체의 힘으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추구함으로써 농사일을 통해 농민들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동참할 뿐 아니라 국민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을 공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본래적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길 우리는 열망하고 또 힘을 합할 것”이라고 농민회의 입장을 지지하고 교회사명을 복음화에 맞추었다.(1977.4.24)

1978년 4월 24일, 광주 북동천주교회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모인 700여명의 회원과 윤공희 광주대교구장을 비롯한 전국 지도신부단 및 뜻을 함께하기 위해 모인 전국 각지의 신부들이 운집한 가운데 ‘농민의 기도회’가 개최되었다.

이날 이종찬 전국지도신부는 강론을 통해 비민주적인 농협의 전반적인 운영형태를 들춰내면서 이를 제도적인 악의 소산으로 규정하고, 농협이 농민에게 돌아오도록 농민은 싸워야 될 것이며, 농협은 독점 자본과 정부의 시녀에서 벗어나 농민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하고, 농민의 인권까지 무자비하게 외면한 채 자행되고 있는 획일적인 농정은 이제 농민의 생존권까지 위협하는 중대한 국면에 처해 있음을 개탄하였다.

정권의 도덕성을 폭로한 농민회 : 오원춘 사건

 

▲ "박정희는 영웅 아닌 독재자"라는 오원춘 씨(사진출처/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홈페이지)

오원춘은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에 살면서 가톨릭 신자생활을 하는 평범한 농민이었다. 그는 1978년 청기에서 안동교구 농민회 연합회 산하의 농민회 분회를 조직하여 회장에 피선되었고, 교구연합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오원춘은 1978년 봄에 군 당국에서 농민에게 배부한 감자 씨앗이 싹이 트지 않은 문제와 관련하여 피해보상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같은 피해보상 운동이 점차 확대될 기미를 보이고 오원춘이 강연을 통하여 성공사례를 발표하기 시작하자 당국은 그에 대한 행동의 통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오원춘이 1979년 5월5일부터 5월 21일까지 사이의 15일간, 바쁜 농사철임에도 불구하고 행방불명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얼마 후 오원춘은 영양본당 신부를 찾아가 납치사실을 보고하였다. 그후 농민회 측과 교회의 끈질긴 추적 끝에 오원춘은 양심선언으로 납치사실을 고백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근거로 6월 27일 안동교구 신부들은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오원춘 납치사실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하였다. 이 조사에서 오 원춘이 납치당했던 사실을 확인하고, 더 많은 사람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책위원회는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제작.배포하고 당국에 공식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당국이 7월27일, 안동교구청에 난입하여 정호경 신부를 강제 연행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렇게 당국은 해명은 커녕 오원춘을 비롯 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총무 정재돈과 안동교구청의 정호경 신부를 구속하였다. 1979년 8월 10일, 이사건을 담당한 경상북도 경찰국은 오원춘이 5월 5일부터 21일까지 포항, 울릉도 등지를 개인적으로 여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기관원에 납치.감금되었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고, 정호경 신부가 오 원춘 납치사건을 조사하여 유인물을 작성하면서 정부가 농민운동을 탄압하여 민주주의를 말살하려 한다는 등 왜곡된 사실을 날조, 전파하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또한 경찰은 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정재돈을 <짓밟히는 농민운동>을 배포한 혐의로 긴급조치 9호 위반을 걸어 구속한 것이다.

 

이에 교회는 8월 6일, 천주교 안동교구 주교좌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전국의 120여 사제들이 참여한 가운데 기도회를 개최하였다. 기도회가 끝난 후 항의시위가 있었고, 이어 사제단과 가톨릭 농민회원 등 80여명의 신자들이 무기한 항의농성에 들어갔다. 8월 9일의 원주교구와 청주교구에 이어, 8월 20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주최의 기도회가 7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려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기도회는 인천, 수원, 광주, 전주, 마산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국은 언론을 동원, 대대적인 여론재판을 벌였다. 9월 4일 첫 공판이 열렸는데, 검찰의 직접신문에 대체로 공소사실을 시인한 오원춘은 검찰의 심문이 끝나 갈 무렵부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여 자신의 진술이 사실과 다르다는 의혹을 남겨 주었다. 검찰과 경찰은, 오원춘씨가 영양읍내에 있는 다방의 아가씨와 불륜의 관계에 빠져 고민해 온 끝에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와 처음 만났다고 되어 있는 날짜에 오원춘씨는 청기에서 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 총무 정재돈을 안내하고 농민회 분회의 일을 함께 토론한 사실이 밝혀졌다.

1979년 10월 15일, 오원춘에게는 징역 2년이 선고되었고, 정호경 신부와 정재돈은 각각 분리 심리를 받았다. 그로부터 11일 뒤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사살사건이 발생하였고, 오원춘은 그해 12월 8일 형집행정지로 정호경 신부, 정재돈과 함께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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