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8]

장면정권에 유착된 교회의 위기

1960년대는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 가톨릭교회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하는 중요한 시기로 포착된다. 적극적 반공주의자였던 비오 12세 교황의 영향으로 교회 보수화의 절정을 이루며 가톨릭교회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던 시대를 넘어서서 현대사회에 대한 사목적 대안을 획기적으로 마련하려던 요한 23세 교황의 출현으로 교회는 바야흐로 변화와 쇄신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한국교회 역시 공산주의에 대적하는 “행동하는 시대”를 표방하며 해방 이후 미군정의 배경을 입고 이승만 정권에 적극 편입해 들어가다가 결국 정치적 입장과 이해관계가 어그러져 갈등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교회가 민주당 정권에 동조하는 가운데 5.16군부 쿠데타를 맞이하여 일제식민지하와 같이 소극적 정치참여에 머무르다가 바티칸공의회 이후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개혁하려고 노력하던 시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1950년대는 자유당과 민주당의 각축시기였다. 여기서 노기남 주교가 야당 세력, 즉 장면 세력을 지원한다는 점을 빌미로 이승만 정권은 로마 교황청에 주교 교체 문제를 요청하기 위해 당시 법무부장관을 파견한 바 있다. 이리하여 로마 교황청에서는 이들 이승만 정권의 주장의 진위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서 아가니지안 추기경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아가니지안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실정을 조사하고 이승만과 면담을 한 후, 노기남 주교의 행동이 결코 종교와 정치를 혼동하는 것이 아니었고 종교인으로서의 고유한 영역 내에서의 활동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노기남 주교는 1959년, 중요한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법무장관의 바티칸 방문, 아가지안 추기경의 한국 방문이 의미하는 것은 자유당 정권과 교회의 예민한 대립을 나타내는 한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은 1958년, 당시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취임하려 했던 박양운 신부의 임명을 천주교 신부라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거절하려 했고, 1959년도에는 소록도의 교우 의사를 단순히 천주교 신도라는 이유로 파면, 추방한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 따라 공무원이던 교우들이 좌천되거나 파면당하는 현상이 여러 곳에서 보고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유당 정권은 <경향신문>을 무기정간 시켜 4.19혁명 이후에야 복간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국 민주당정권에서는 1961년 2월에 원 주교, 구 주교, 메리놀 선교회 캐롤 주교가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것은 민주당 정권의 천주교에 대한 일종의 호의의 표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민주당 정권 그 자체는 집권 기간이 너무 짧았고, 그리하여 비록 이 정권과 유착 관계에 있었다 해도 민주당 정권으로부터 교회가 받은 혜택은 크게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교회는 앞으로 전개될 교회의 여러 사업들에 대해서 일종의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어떤 집단보다도 먼저 쿠데타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접근하고자 노력하였다.(「휴전 이후 한국천주교회상」, 조광, <교회와 역사>172호 12-17쪽 참조)

 


반공친미 군사정권을 추인하는 가톨릭교회

박정희 육군 소장을 우두머리로 하는 5.16군사 쿠데타는 남한사회의 민주화와 자주화의 열망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5.16군사정권은 6개항의 혁명공약을 천명하였는데, 이들은 쿠데타의 목적을 확고한 반공태세를 갖추는데 두고 있다고 천명하였다.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다섯째,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이에 따라서 혁명위원회는 포고령을 발동하여 모든 사회단체와 정당을 해산시키고 집회 및 출판의 자유 등 국민의 모든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4월 혁명 이후 남한의 노동운동사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갖는 한국교원노조 연합회의 활동은 사실상 정지되었고, 반공우익정권이었던 장면정부가 입법을 추진했던 반공법과 데모진압법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에 대한 의지를 과시했던 학생운동 세력과 통일운동을 벌이던 혁신 정치계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5월 18일 미국무성은 한국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자가 반공친미적임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승인하였다. 같은 날 장면내각은 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의결하였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계엄령을 추인하였다. 이에 육사생도들은 혁명을 지지하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상황의 귀추를 바라보며 불안해하던 한국천주교회는 서둘러 쿠데타정권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던 <가톨릭시보>에서는 “군사혁명과 반공정책 : 반공은 국토통일보다 중요하다”라는 기사를 통하여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인데 공산치하에서는 잘살 수 없으므로 군사혁명정부가 국시를 반공으로 삼은 것은 현명한 정책이다... 또 이 땅이 공산화되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한다던가 공산당의 음모를 알면서도 민주주의에 충실하기 위하여 언론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가톨릭시보> 1961.5.28;280호)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시점을 전후하여 교회측 언론은 대대적으로 쿠데타세력의 반공노선에 이데올로기적 동의를 표명하고 나섰다. 이 당시 발표된 기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가톨릭시보 281호: 이데올로기를 주도록 하자 -공산주의는 현대의 無神종교
282호: 공측(共側)의 이론과 실천을 보다. -교회의 가르침에 일치해 가는길
283호: 교리지식은 공산주의에 보내는 최선의 대답이다
284호: 주일날 맞이하는 6.25 -절박감에 당황하지 말자
1962.5.24 332호: 공산군남침 12돌에 즈음하여
-6.25를 모르는 오늘의 신자만도 30여만


이 당시 교회는 자신이 반공투쟁의 선봉장인 것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새롭게 부상하는 군사정권에게서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을 발견하고 적극 지지함으로써 민주당과의 유착관계 속에서 형성된 정치적 이익을 보호받을수 있는 안전망을 구축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추진회

이러한 연장 선상에서 한국교회는 군사정권의 시책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1961년 9월 10일 간담회를 갖고 쿠데타 군부정권이 추진하던 '재건국민운동본부'에 가입하여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추진회'를 결성한 것이 그것이다.

‘재건국민운동’은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부조리한 사회악을 일소하고 새로운 사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켜 쿠데타의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술책이었다. 즉, 박정희 군사정권은 무력을 통하여 집권한 뒤 대중에게 정치적 동의를 얻으려는 이데올로기 정책을 편 것이다.

이에 천주교회에서는 노기남 주교를 총재로 하여, 이해남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고문단에 신인보, 양기섭, 신응균, 장금구, 조인환, 박귀훈, 박희봉, 김창문, 김옥균, 백일성 신부를 위촉하였다.

이 운동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주교단에서 1961년 12월 4일자로 “영육의 각 분야에서 신앙을 실천하라!”는 교서를 발표하여 이를 전교회적으로 확산시키는데 뒷받침하였다.

"오늘날 우리 혁명정부는 재건국민운동을 부르짖고 국민 각자의 부정과 부패를 일소하는 정신적 혁명을 모든 국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당연한 운동이며 호소인 것이다. 재건국민운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하고 국민 각자의 진정한 정신적 혁명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신앙의 힘이 크다고 사료하는 바이다. 우리 신자들은 신앙의 정신으로 재건국민운동에 적극 협력하라!... 특히 신자 지도를 맡은 모든 본당 신부들은 주일 강론중에서도 신자들에게 이러한 정신과 실천을 강조해 주기 요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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