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5]

1956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정황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은 1954년 9월 자신의 종신집권을 가능케하는 “초대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조항을 핵심으로 하는 세번째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하여 “사사오입개헌”을 감행한다. 이 사건으로 결정적으로 민심이 이반하여 1955년 민주당이 출범하게되고 진보당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호헌동지회를 중심으로 추진된 민주당은 민국당 계열의 김성수, 신익희, 조병옥, 김도연, 유보선과 무소속의원들, 그리고 원내 자유당세력인 장면, 오위영, 김영선등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혁신계열이 소외된 상태에서 창당된 민주당은 ‘반공이데올로기와 자유민주주의 신념’을 천명하였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자유당이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지명하였다. 민주당은 구파(舊派)의 신익희와 신파(新派)의 장면을 각각 세웠다. ‘진보당창당추진위원회’는 조봉암과 박기출을 후보로 세웠다. 이 당시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내세웠으며, 자유당은 “갈아봤자 소용없다”는 구호로 맞섰다.


이 선거에서 야권이 민주당과 진보당으로 갈라서자, 국민들의 여론은 민주당과 진보당의 단합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원했다. 그러자 조봉암은 4월 3일 필요하다면 정부통령 후보지명을 백지화하고, 진보당측에서 대통령 출마를 포기하는 대신에 부통령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야당의 후보단일화에 위협을 느끼고 “공산당과 합작해서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등의 언동은 50년 전의 매국매족하던 비극을 재현하려는 망동”이라며 단일화를 반대하는 민주당내 우익세력을 엄호하였다.

이 과정에서 누구보다도 단일후보 협상에 반대한 사람은 장면이었다. 장면의 입장에서는 구파인 신익희로 대통령 단일화가 되어 당선되는 것도 달갑지 않았지만, 이름도 없는 박기출에게 부통령 후보를 사양할 수는 더더욱 없었던 것이다. 장면은 원내 자유당 출신 참모들과 의논한 끝에 ‘단일화추진회’를 거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상태에서 신익희가 조봉암과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선거 열흘 앞두고 갑자기 죽음으로서 대통령은 이승만과 조봉암의 대결로 굳혀지고 말았다. 그러자 민주당은 “조봉암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표를 주라”고 호소하기까지 하였다. 이승만 개인독재를 비난하고 곧잘 ‘구국투쟁’을 선언한 민주당이었지만 그들 역시 자유당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름없는 보수 친미반공세력이었음이 드러난다. (「이승만 대 조봉암, 신익희」,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1992.여름호 참조)

물론 장면을 위시한 민주당 인사들은 이승만정권의 탈법적인 정치관행에 대하여 비판적 자세를 취하였으나, 자유당 정권에 맞서 민주당을 창당한 동기 자체가 이승만과의 갈등 및 정치권에서의 소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다만 장면 등 원내 자유당 출신 민주당 신파 그룹은 미국식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선거와 가톨릭 교회정치

▲ <가톨릭청년> 1956. 5월호에 실린 장면 선거홍보 기사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장면으로 대표되는 가톨릭 인사들의 정치권 진입을 위하여 힘을 모으게 되었다. 교회의 고위성직자들은 공개적으로 이승만정권을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장면이 이승만정권으로부터 소외되고, 원내 자유당 인사들이 민주당에 합류하는 과정을 통하여 실제적으로는 반이승만 전선에 정치적으로 포진한 것이다.

이미 1953년에 <천주교회보>에서는 “병든 민주주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신앙 깊고 학식 넓은 장면박사를 부통령으로”라는 제언이 실리고 있다.<천주교회보> 1953.5.6)

한편 천주교 정치세력은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미국과의 친화관계를 확대하기 위하여 교회적 외교역량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이미 공식적인 정치적 영역 속에서는 이승만정권에 의해 외교루트가 차단되어 있었지만 가톨릭교회의 국제적 성격으로 인하여 간접적인 외교전술이 가능하였다.

특히 1954년 스펠만 대주교가 방한하였을 때, 종현대성당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장면은 가톨릭교회를 대표하여 스펠만 대주교를 "한국독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6.25동란시 물심양면의 적극적인 원조를, 한국가톨릭 발전에 적극적 후원을 하신 우리의 은인"이라고 칭송하였다. 스펠만 대주교와 장면의 교제는 대주교가 미국 정계에서 갖는 영향력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외교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이 당시 스펠만 대주교가 뉴욕교구 대표로서 한국 가톨릭고아원에 3만 5천불을 지원하기로 한 사실은 미국의 전재 구호품이 대부분 교회를 통하여 공급되었던 관행과 관련하여 볼 때, 일반 국민에게도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경향잡지> 1954년 2월호 42쪽 참조)

더구나 장면이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언론매체를 통하여 장면에 대한 지원을 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이 깊이 관여한 바 있었던 <가톨릭청년>지는 1955년부터 새로운 정치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도 덕망있는 린컨과 같은 정치가가 요구되며 중상모략으로 인재를 무시하고 상호배격하는 것으로 자신의 방어술로 하여 과도기인 기회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노려보는 민정(民政)이라면 어느때에 경제적으로나 산업으로나 사상적으로 타의 침략에도 대처할 수 없는 혼돈된 상태에 매몰되어 버릴까 우려되는 것이다... 권리와 세력과 재정과 정당 등의 압력으로 순량한 민중을 악용하며 허위의 여론을 야기하여 자유와 양심적인 민의를 좀먹어 마비케하여 개인의 야욕을 채움으로 올바른 질서를 교란시킴으로 사회재건의 탑을 유도 자멸케 하는 바가 허다한 것 같다." (禮悟, 「사회의 편모」, <가톨릭청년> 1955.신년호 26-27쪽)

"우리나라 현하의 실정을 살펴보면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을 움직이는 인물의 대부분이 집권과 모리에 열중한 나머지 국가와 민족이 안중에 있는가 싶지 않다. 이같이 부패하고 타락된 환경 속에서 도의는 여지없이 퇴폐하고 불의와 패륜의 온갖 사회악이 날로 늘어가는 것이 감출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조근영, 국립도서관장, 「역경 속에서」, <가톨릭청년> 1955.3월호, 10쪽)

한국 천주교회의 정치적 참여, 즉, 반이승만적 민주당 세력에 대한 지지는 이승만정권에게 눈의 가시처럼 보였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교황청 포교성성장관 아가지니안 추기경이 한국을 방문하자, 장경근 등 국무위위원들은 ‘정치주교’라 불리던 노기남 주교를 주교직에서 해임달라고 추기경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한국천주교회의 위상>,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편, 분도출판사, 1985 20쪽 참조)

천주교회에 대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반감은 결국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대구 ‘매일신문 테러사건’에서 극명하게 돌출되었다. <대구 매일>에서는 9월 13일자 사설에서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제목아래 관제동원에 대하여 비난하였다. 이 사설이 발표되자 대구에 있는 ‘적성감위 축출위원회 경북도지부’ 등 관변단체에서는 그 사설을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하는가 하면, 14일에는 국민회 경북본부 김민 및 자유당 경북도 감찰부장 홍영섭 등이 지휘하는 테러단이 대낮에 신문사를 습격한 것이다. 그후 이 사건이 커다란 사회문제로 되자 경찰에서는 오히려 대구매일의 최석채 주필을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하고 말았다. 대구 매일은 매맞고 구속당한 셈이 되었다.(<가톨릭청년> 1955.11월호 참조)

<가톨릭청년>에서는 1956년 4월 대통령 선거에 임박해서 일제 태평양전쟁기에 황국신민화 정책에 동조해서 반민법으로 구속된 바 있었던 육당 최남선까지 동원하여 가톨릭 이외의 바람직한 정치적 대체세력이 없다는 견해를 은연중에 선전하였다.

▲ 최남선은 해방 이후 천주교로 입교했다.
육당 최남선(베드로)는 「나는 왜 가톨릭에로 전향하였는가?」라는 장문의 개종사유를 밝히면서 “이제 한국이 정치적으로 해방을 보았다 하고 역사상으로 신국가를 건설하고 신문화를 창조한다고 하나 그 입각점을 볼 때에 아무 믿을만한 정신적 기반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천주교회의 정치적 사상적 우월성을 강변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 눈에는 2천년래 인류의 정신상 생활상 대지주로 문예부흥, 종교개혁, 산업혁명, 과학발전, 온갖 풍파를 치르면서 작은 동요도 보이지 않고 支天의 큰 기둥처럼 위용을 과시하는 가톨릭이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지 아니한가? 이제 가톨릭을 提擧할진대 따로이 도덕동맹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가톨릭은 국내에 30만의 경건한 신앙체를 결성하고 있으며, 전세계에는 4억 7천만이라는... 견고한 一心同德의 대집단이 있어 독자의 한 세계를 형성하였나니, 이것이 어찌 일조일석에 가히 제안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랴? 금일 이 정세에서 한국의 내일을 믿음직하게 맡길 곳이 이 가톨릭을 제하고 또 무엇이 있다하랴."(<가톨릭청년> 1956년 3/4월호, 10-12쪽)

실제로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지친 민중들은 민주당에 기대하는 심리를 표출하였으며, 더구나 천주교회가 장면 등 신진 정치세력을 후원함으로써 1956년 5월 충남서산군 대호지면 도리리 5개부락주민 350명이 정부통령 선거를 기화로 집단으로 천주교에 입교하는 사례도 빚어내었다.

선거 당시 <가톨릭청년>은 "부통령 입후보 요안 장면박사 기호 1"이라는 구호와 함께 "세계외교무대에서 장면박사는 그의 인격과 덕망 웅변으로 특색있는 '챠밍'한 존재로서 그의 이름을 떨치고 있다. 우리 한국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에다 동양적인 겸허한 태도와 천주교 신자로서 경건한 마음, 그리고 조리있는 열변은 다른 외국의 외교관들에게 보기 어려운 고귀한 존재"(<가톨릭청년> 1956. 5월호 참조)라고 장면을 선전해 주었다.

결국 전국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개표가 중단되는 등 험악한 상황에서 치르어진 선거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에,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장면은 <가톨릭청년>지에 "부대통령 당선에 감사하며 나의 소신을 피력한다"라는 글을 게재하였다.(<가톨릭청년> 1956. 6월호)

그러나 이 선거에서 민주당은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부분적으로 타협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4.19 민주혁명이 성공하여 열린 혁명재판에서 자유당 인사들이 밝힌 바에 의하면, 일부 개표소에서 개표가 시작되었는데, 조봉암의 표가 많이 나오자 이에 놀란 자유당 간부들은 "부통령 개표는 공정히 할테니 대통령 개표는 종사원에게 맡기라"고 민주당과 협상하여 민주당 참관인들이 대통령 선거개표를 방관하거나 외면했다고 한다.(오유석, 「이승만 대 조봉암, 신익희」,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 1992.여름호, 153쪽 참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