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 14-1960년대]

변화를 위한 신학과 사목적 토대

1968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메델린 CELAM)가 중남미 대륙의 불의를 변혁시킬 수 있는 민중해방적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공의회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그 대륙에 토착화시킬 수 있는 신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신학은 곧 새로운 사목활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으로서 종교운동에서는 특히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동안 외국선교사들의 신학을 그대로 수용한 상태에서 한국적 토양과 현실에 적합한 신학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바티칸공의회의 사목적 성과가 제대로 사목활동에 적용되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도 한국전쟁 이후에 성직자의 해외 유학이 본격화되었다. 이들 중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을 공부하고 와서 1960년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한국 가톨릭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제공한 이들이 생겨났다.

<1960년대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교회 박사학위 취득자>

1966년 정하권 신부(스위스 프라이부룩 대학 교의신학)
1968년 서공석 신부(그레고리안 대학 교의신학)
1969년 서인석 신부(파리 가톨릭대학 구약성서학)
1969년 최창무 신부(서독알버트 루드뷕 대학 윤리신학)
1973년 함세웅 신부(로마 그레고리안 교부학)

1960년 말은 가톨릭운동과 한국교회 자체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신학적 토대가 갖추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사목적 준비도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즉, 한국천주교회사에서 1966년 3월 5일, 김수환 신부가 신부의 자격으로 마산교구장에 착좌 되어 공의회의 결과를 적극 교구사목에 수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이기도 했던 김수환 신부가 1969년 3월 28일,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실로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의 구조 자체가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로 교계제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추기경 한 사람의 입김이 갖는 영향력은 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김수환 추기경
한국교회 최초의 추기경이기도 한 김수환 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기대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무척 노력한 것 같다. 바오로 6세는 추기경 서임 직전에 미국 보고타에서 새로 서품된 사제와 부제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당부하셨다.

주여, 여기 있는 새 사제와 부제들을 보소서... 우리는 주께 기도드립니다. 그들의 봉사와 그들의 모범으로 이 지방에 가톨릭신앙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이 이 땅을 비추게 하시며, 이 빛이 활동적이고 너그러운 사랑으로 반사되게 하소서. 그들의 증거는 주교들의 증거를 따르고 동료들의 증거를 강화하며, 하느님 백성의 참된 신앙생활을 길러줄 줄 알게 하소서. 명철하고 용감한 정신으로 사회정의를 진작시키며, 빈자를 사랑하고 보호하며, 복음적 사랑의 힘과 어머니요 스승인 교회의 지체로써 현대사회의 요구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사목> 1968년 11월 9-14쪽 참조)

변화의 주도권이 아직도 성직자들에게 있는 교회현실 속에서 사제들에게 권고하는 말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 당시 주교회의에서 바티칸공의회에 대한 사제들의 대응자세를 복음적으로 해명하고 권면 해 준 것은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방향을 전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므로 좀 지루하더라도 읽어주기 바란다.

“한국의 모든 사제들에게” (한국주교회의 추계정기총회 이후 1969.12)
- 공의회의 가르침에 맞추어 성직자들의 민주적 관행을 촉구하고 위로하는 글 -

사제들이 웃으면서 농담하는 말을 우리는 가끔 들었습니다. 즉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황의 공의회이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주교들의 공의회라면 제3차 바티칸공의회 즉 사제들의 공의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농담이지만 일리 있는 말입니다... 아마도 누구의 말대로 본당 신부들의 위치가 지배하는 위치로 확립되었을 때는 수사, 수녀, 평신도들은 무시를 당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현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현 사제의 위치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새 교육, 새 연구가 필요합니다.

우선 주교들이 배워야 하겠습니다. 1970년 1월에 교구장 및 장상들의 교육이 실시될 것입니다...

현 사제상을 그리는 데 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즉, 사제정신과 사목 지침을 우선 예수 그리스도께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많이 연구했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무식하니까, 혹은 부유 속에 만족하고 있으니, 그렇다고 했다. 또 공산주의, 제국주의, 사회주의를 번갈아 탓하기도 했다. 또는 열심 없는 신자, 미지근한 신부들의 탓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많은 지식도 아니고 웅변도 아니고 권위도 아니며 오직 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가신다... ” 이는 20년간 노동생활을 한 어느 사제의 말입니다.

교회는 이제까지 사제들을 미성년 취급하듯 해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법에 따라서 사제들의 생활테두리가 정해져 있어서 그런 인상을 주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혁신하고 자주적 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오늘은 사제들의 판단과 진취성이 요청되고 있습니다. 교황이나 교구장들은 세밀한 것까지 다 지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책임은 제반 문제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신도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신품성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봉사의 구체적 방법은 사제들이 스스로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맡은 신도들에게 합당한 강론을 하고 적절한 지도를 해주며, 필요한 단체를 조직시켜 주는 등등 여러 사정을 시대의 변함에 따라 사제는 연구하고 실시할 것입니다.

아무튼 언제나 어디서나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할 만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로 합시다. 우리는 첼레스띠노 1세 교황께서 하신 말씀을 다 한번 음미해 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분별 되어야 하느니 이는 옷차림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표양으로써 제복으로써가 아니라 우리의 처신으로써 우리 몸의 겉치장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순결로써 이니라.”

우리는 다 같이 이 한국땅에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명실공히 우리의 고유한 문화전통 위에서 한국교회다운 교회를 건설해야 하겠습니다...

끝으로 수다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희생을 바쳐가며 열렬한 마음으로 사목에 노력하시는 사제들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빌려 결론을 삼겠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불을 놓으러 왔습니다.
이 불이 벌써 타올랐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루가 12, 49)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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