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 천주교 현대사-2]

1950년을 전후 남한사회는 강력한 반공주의 정부의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에도 남로당 활동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완전히 지하화한 남로당은 결정적인 시기에 대비하여 무장세력을 조직하고 군부에도 남로당원을 침투시켜 은밀히 그 조직을 확대시켜 왔다. 그 과정에서 제주도 4.3 민중항쟁이 일어나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에 진압명령이 내려오자 이 연대의 좌익군인들은 명령을 거부하고 소위 ‘여순반란사건’을 일으켰다. 여기에 마산에 주둔한 제15연대가 합세함으로써 이 반란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 반란은 군,경의 반격으로 주력부대가 지리산으로 들어감으로써 유격전으로 발전하였다. 이 외에도 대구에 주둔한 제 6연대의 반란(1948.12.30)이 있었고, 그 몇달 뒤 38선 부근의 홍천, 춘천 주둔 제 6사단 8연대 소속 2개 대대가 집단 탈영하여 월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부 수립후 대대적인 민주개혁을 기대했던 많은 민중들은 이승만 정권아래서 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모멸감을 겪으며 이러한 좌익반란운동을 적극 지지하거나 동감하는 분위기였다. 이에 따라서 이승만정권과 교회 역시 사회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한정권은 장면 등을 통해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미국에 요청하는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보다 치밀하게 반공태세를 갖출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질서 재건에 대하여 교도와 동포들에게 고함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천주교회는 국내정세를 감안하여 한편에선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하여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안을 적극 모색하고, 또 한편에선 그해 5월에 있을 총선거에서 반공전선의 최후전사인 가톨릭 인사들을 정치권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사회주의에 호응하기 쉬운 신도들과 민중들을 계몽하고, 교회의 사목자들이 반공선전의 설교자가 될 능력을 갖추도록 독려했다. 이에 천주교 주교들은 공동명의로 1950년 4월 1일자로 <사회질서 재건에 대하여 교도와 동포들에게 고함>이라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자모이신 성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고장에서나 부자의 착취할 권리와 가난한 자들의 착취당할 의무를 가르쳐온 일이 없으며 또한 양의 거죽을 쓴 시랑이들의 허무맹랑한 감언이설로서가 아니라 만고불변의 진리의 길을 좇아 참으로 ‘인민의 벗’이 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독재주의 공산주의에도,자유주의 자본주의에도 다 위험한 독소가 들어 있어서 우리의 구원의 보약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그중에서도 특히 공산주의는 수난기의 여러 민족들이 즐겨마신 달콤한 독약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처럼 공산주의야말로 ‘인민의 아편’임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아야 할 필요가 절실한 시대는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회문제 해결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 ‘사제들의 제일 중요한 일’이며, ‘성직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사회과학의 열심한 공부로 적절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신 비오 11세의 회칙을 다시 한번 회상하라... 사랑하는 대한 천주교여, 총궐기하여 십자가의 깃발을 높이 들라. 반드시 ‘이 표적으로 이기리라!’."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총선거는 미군정의 후원아래서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해 강행된 5. 10 총선거에 비하여 이승만정권에게는 어려운 조건아래서 진행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 예상되었던 반민족자 처벌문제도 이승만 정권의 방해공작으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민중들에게 원성을 샀을 뿐만 아니라 토지개혁 역시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해 선거는 비교적 좌익운동에 기울어지는 분위기에서 실시된 선거였기 때문에, 가톨릭교회 역시 긴장된 분위기에서 총선거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가톨릭교회의 총선거 지침

▲ 제6대 교구장을 지낸 고 최덕홍 주교(1902~1954)
따라서 <천주교회보>는 사설에서 “제2차 총선거에는 우리는 가톨릭 국회의원이 많이 선출되기를 기대”한다는 제언과 함께 천주교신자 국회의원 후보의 광고를 실었다. 한편 대구교구의 최덕홍 주교는 <총선거에 임하는 가톨릭의 태도>라는 교구장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최 주교는 가톨릭교회가 “새로운 국회에 사회질서의 옹호자로서 국회의 권위와 권력에 대하여 정당한 견해”를 갖고 있으므로, “가톨릭 정신을 입법부에 널리 침투하기 위하여 존경과 신뢰를 받으며 정신적으로 우수하며 또 강력한 성격도 가진 가톨릭 대의원을 많이 보내야 할 것은 췌언을 요치않는 바로서 본 주교는 교구내 모든 신자들에게 이를 위하여 특별히 천주께 기구하며 각자의 직분과 역량에 따라 힘쓸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이 담화문에서는 총선거 때에 투표하는 지침을 정해서 신자들에게 공지하였다:

1) 총선거일에 모든 교우는 가급적 미사에 참례하고, 국가를 위해 기구하며 될 수 있으면 영성체할 것.
2) 반종교, 반교회 입후보자에게 투표함을 금함.
3) 교우중 교회를 대표할 만한 인사(열심수계하며 교우다운 생활을 하는 자)가 출마하였을 때에는 교우들은 적극 후원할 것이요, 투표구에 교우 입후보자가 없는 지방은 가톨릭교회를 이해하고 옹호하는 친종교적, 친교회적 후보자에게 투표할 것.

그러나 총선 결과는 교회가 우려하던 바대로 나타났다.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선거는 남한만의 단정수립을 결정지은 1948년 5.10총선거와 달랐다. 이번 총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 단정반대 및 중도세력을 포함하여 무소속들이 대거 국회에 진출하여 무려 62.9%(총 210석중 126석)를 차지하였으며, 지배계급이며 친여당적 성격을 지닌 대한민국당이 11.4%, 구지배세력이면서 야당계인 민주국민당이 11.4%를 차지하였다.

한국전쟁이 구원해준 이승만 독재정권

제1대 국회의원중 재선된 의원은 겨우 29명 뿐이었다. 만약 한국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한 이승만은 실각하고 중도세력 중심의 연립정부가 수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당연히 몰락할 이승만 정권을 구해주었고 더 이상 발붙일 곳 없이 사라져가던 우익 지배세력을 구해주었다.

즉,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은 간접선거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급기야 1952년 5월 25일 공비잔당 소탕이라는 명분으로 경남과 전북지역에 비상계엄령을 내린 상태에서 군경을 동원하여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췌개헌안을 기립표결로 통과시켰다.

이러한 공포분위기 속에서 졸속으로 치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물론 이승만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봉암이 혁신적인 정책을 들고 나와 이승만과 민국당의 후보 이시영에 대적하여 79만표(전체 유효투표의 11.4%)를 얻음으로써 민국당의 이시영 후보를 앞선 것은 민심의 방향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사실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장면과 이승만이 오랜 동지관계를 청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가톨릭운동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은 친미반공주의 정책에 있어서는 이승만과 정치적, 사상적으로 공감하였으나, 이승만이 반민주적 독재정권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일반원칙에서 너무나 벗어나 버리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가톨릭교회의 배경을 안고 원내 자유당 의원들과 함께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모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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