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23]

1979년 한 해는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에서 중요한 매듭을 짓는 시기였다. 1978년 바오로 6세 교황이 타계하고, 요한바오로 1세 교황이 “가난한 이들은 교회의 보물”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새로 즉위하였으나 33일만에 선종하고, 곧이어 최초로 동구 폴란드 출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자리에 올랐다. 그는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의 개혁적 뜻을 계승하고자 했던 전임교황과 마찬가지로 요한-바오로라는 이름을 계승한 것이다. 초기에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은 보수적인 교황청 관리들의 입장과 차별성을 유지하면서 1979년 푸에블라에서 열린 중남미주교회의 개막연설에서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절박한 호소에 응답하였다.

푸에블라 주교회의는 라틴아메리카 교회를 둘러싼 변혁적 세력과 현상유지세력의 치열한 공방전을 마무리하는 회의였기 때문에 당시 세계교회는 강렬한 관심을 갖고 회의결과를 주목하였다. 1970년대에 중남미주교회의 사무국(CELAM)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로페스 트로히요 주교는, '예수성심회 연구소'를 통해 해방신학에 반대하던 예수회 베케망스 신부의 신학적 도움을 받아가며, <녹색의 책>이라는 영신주의 문서를 작성하여 메델린 주교회의에서 결정된 “해방”적 메시지를 뒤집어 엎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푸에블라 주교회의 개최는 이러한 음모를 관철시키려는 노력의 결과였다. 이들은 교황청의 바기오 추기경을 중계인으로 삼았다.

그러나 실제로 푸에블라 주교회의 과정에서 이들이 제출한 문서는 폐기되고 메델린 주교회의를 이끌었던 주교회의 의장 로샤이데르 추기경과 안즈 추기경의 노력으로 이미 중남미에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던 교회기초공동체의 목소리를 담아내어 결정적으로 회의를 변혁적 교회의 방향으로 이끄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이 회의를 전후하여 한국교회 지도층에서는 서로 의견이 극심하게 엇갈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무척 시사적이다. 당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부의장으로 있던 김남수 주교는 1978년 시노드(주교 대의원 회의) 4차총회에서 사회정의 분야에 관한 토론중에 ‘종합보고서’에 담긴 “그리스도교의 교리교육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 인격의 존엄성을 자각시켜 스스로를 방어하며 참된 인간발전을 성취할 수 있게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3항)”는 내용이 계급투쟁을 옹호하는 인상을 준다며 수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른바 해방신학은 초자연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극도로 감소시켜 현세적 가치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한 경향을 시노드가 인준해 주면 안된다.”는 것이다. 김남수 주교의 이 발언이 있은 뒤 즉각, 우익성향의 중남미 주교회의 사무총장인 트로히요 주교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어 “고맙다”는 뜻의 인사말을 적은 쪽지를 김 주교에게 건네주었다. 김주교는 이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현대세계의 교회와 청소년 교리교육」, 김남수 수원교구장, <사목> 1978.7 참조)

한편 메델린과 푸에블라에서 교회가 중남미 민중의 해방운동을 지지하는 행위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던 김남수 주교와는 반대로, 교회가 민중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해방운동에 동참하는 것을 적극 지지하는 한국교회 주교들도 있었다. 가령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에는, 1979년 3월 1일, 명동대성당 3.1절 기념미사에서 푸에블라 주교회의에서 교황 요한바오로 2세의 지지발언을 적극 환영하였다:

"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1월 알현때, 정의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정의가 인간과 사회의 기본토대임을 강조하시고 정의없는 체제나 제도를 비판하시면서 인간을 위하여 체제가 있는 것이지 체제를 위하여 인간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1월 28일 라틴아메리카 주교총회에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특정 정치나 경제체제 및 이론에 환원시켜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시고, 인권투쟁이나 인간의 모든 문제해결 노력에 있어서 하느님이 보시는 관점을 잃지 않도록 강조하시면서 사회부정, 물질주의, 폭력을 통렬히 비판하셨습니다.

이어서 교회의 복음선교의 사명은 전력을 다해서 부정을 종식시키고 ‘모든 체제와 기구를 인간적으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가 인권을 옹호하고 곤경과 궁핍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것은 바로 복음적 헌신이며, 때문에 정의구현과 인간발전을 위한 노력은 복음선포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1979년 시국에 대한 가톨릭교회 진보그룹의 폭발적 저항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다시 한번 '3.1절 기념 시국기도회”에서 “민주, 민족, 민생의 민중복음을 선포한다'는 선언문을 다시한번 발표하여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이 시대의 진실과 정의를 증언함에 있어 먼저 우리 교회 스스로가 정의로와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를 것을 다짐하면서 3.1운동의 기본정신인 민주주의, 민족주의, 평화주의의 정신이 복음정신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정의평화위원회도 때를 같이 하여 ‘3.1절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979년 ‘부활주간’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는 <오늘의 한국현실과 그리스도교회의 입장>이라는 백서를 발표하였다. 이 백서는 1970년대 한국현실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복음적으로 식별하여 앞으로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 백서에서는 1979년 2월 중남미 주교회의에서 남미주교단 대표 아른스 추기경의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여 ‘호교론적 태도’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제시하고, 근본적으로 재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교회를 방어하는 것보다 인간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선결문제다. 교회는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교회를 공격하지는 않는다.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뜻은 정말로 한 백성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주일미사에 나가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교회의 구성원이다."

아울러 1978년 7월 6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 9대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당인 공화당 후보 1인만이 출마하여 99.9%의 득표율로 임기 6년의 대통령직에 당선된 사실에 개탄하면서, 우리나라에 4, 5개의 정당이 있으면서도 대통령 입후보자를 한 정당에서만 내고 투표를 강요한 것은 한국의 정치현실이 참여단계에서부터 비정상이라고 간파하였다. 이는 대통령 선거에 뒤이어 실시된 제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 1 야당인 신민당이 여당인 공화당보다 많은 지지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과 국회법으로 인해 실제 의석수는 여당이 독점하는 ‘제도상의 모순’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런 파행적인 정치질서 속에서 자행되는 독재정권에 의한 불의한 사회, 문화, 경제적 현상에 대해 이 백서는 신랄하게 분석하고 있다.

결국 유신정권의 불의와 반(反)인권적 상황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4.19를 맞이하여 “우리에겐 행동과 말의 자유가 없으며, 우리 집은 실상 창살없는 감옥이다. 차라리 우리를 감옥으로 보내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탄압에 대하여 항의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개탄한다”고 고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끝장내기 위해 7월 12일, “친교를 이루시는 성신”이라는 제목으로 원주교구 교육원에서 열린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세미나에서는 65명의 사제들이 모여 오늘을 사는 사제단의 영성, 예언자들의 수난과 그 의미, 구원의 신학적 반성, 상황진단, 체험나누기 등을 통하여 사제운동의 위치와 사명에 대해 겸손하게 확인한후 <민중복음선언>을 발표하였다.

<민중복음선언>에서는 그리스도처럼 “우리는 먼저 이 땅에 복음을 실천하고 증언하고자 한다”고 전제한 뒤 “민중에 대한 억압과 수탈은 하느님께 대한 모독이며 그것을 억압하는 자와 억압당하는 자 모두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행위”이기에 “민중을 억압하는 체제와 제도는 폭력”이고 “그 폭력은 마침내 각성된 민중의 힘에 의하여 타파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선언하였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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