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
-'79치명복자 한미가톨릭 연합경축대회'
-이승만정권의 교회탄압 : 경향신문 폐간사건

한국교회정치의 양면성 : 호교론적 태도와 정치선전

야당인 민주당의 후보로 나와 부통령으로 취임한 장면은 임기 4년동안 이승만대통령의 푸대접과 사찰당국의 감시로 제대로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1956년 9월 29일 민주당 제 2차 전당대회에서 저격당할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다행히 왼손에 총탄을 맞아서 살았다.(<장면 회고록> 46-48쪽 참조)

교회지도자들은 이승만정권과의 갈등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황에서 교회를 보위하기 위하여 대책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중요하게 보이는 교회의 움직임은 먼저 주한미군과 유대를 강화하려는 '79위 치명복자 한미가톨릭 연합경축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던 사실과, 1957년에 발표된 주교단 사목교서의 내용이었다.

<경향잡지>에 실린 '79치명복자 한미가톨릭 연합경축대회' 광고문은 “서울로 모이라. 가톨릭의 위력을 발휘하자!”라는 구호로 시작되고 있다. 한미가톨릭 연합경축대회 준비위원회의 명예회장은 한국측 대표로 노기남 주교, 유엔군측은 미군 1군단장 루우도 중장을 추천하였으며, 미국 스펠만 추기경을 초청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해서 <경향잡지>는 “서울은 대한민국 정치, 경제, 문화의 중추신경의 소재지인 만큼 가톨릭이 여기서 사회적으로 끼치는 영향력은 결국 전국 각지방에로 퍼져나갈 것이며, 이번 대회는 한미가톨릭연합으로 되는 만큼 동 대회의 실황은 통신, 라디오, 사진, 기록영화 등으로 모든 자유진영 사회에 널리 선전될 것”(경향잡지 1957년 9월호 307-309쪽 참조)이라고 결과를 예측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소개된 목적을 보자면:

1. 우리 79위 복자들을 한국인 교우들과 유엔군 교우장병들이 합동하여 공경함으로서 복자들의 영광이 더욱 드러날 것이요, 이에 따라 한국가톨릭 모든 순교자들의 송죽같은 순교정신과, 한국천주교회 자체가 크게 선전될 것이다.

2. 공산정권 경계선에 제일 가까이 있는 민주주의 국가의 수도는 한국의 서울이다. 고로 이번 79복자 한미 가톨릭경축대회는 공산진영에 대한 의미심장한 시위운동이다. 공산주의의 강적은 가톨릭이요, 순교정신은 가톨릭에만 있다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순교정신을 크게 선전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반공운동이다.

3. 한국전선에서 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생명을 희생한 국군 장병들과 유엔군 장병들은 우리 순교자들과 같은 점이 확실히 있다...

4. 일반이 말로만 들어 알고 오던 가톨릭의 국제성이 이번 경축대회에서 크게 드러날 것이다. 수만명 한국인 교우들과 함께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 각국 교우장병들이 일심일체가 되어 행동하는 것은 한 장관을 이룰 것이요, 또 이것은 전교상 가장 좋은 재료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 이 경축대회의 목적은 남한 천주교회가 국제적 연대관계 속에서 특히 주한미군과 깊은 유대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남한사회 전역에 알려서 정치력을 발휘함으로써 교회를 보호받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보인다. 또한 교회가 미국과 유대를 보증할 수 있는 근거는 천주교회의 전투적 반공주의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편 1957년 10월 1일자로 발표된 <천주교 주교단 사목교서>는 시종 반공주의와 이승만정권에 대한 타협적 자세를 공표하고 있다. 즉:

"전란을 겪은 대한민국은 차차 부흥의 실적을 나타낸다... 경제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고는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겠으나 우리는 해마다 진전, 또 진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대한민국의 공동복지 증진을 위하여 첫째, 준법정신 둘째, 정부 시책에 충심 협력이 요망된다...

물이면서 동시에 불이 될 수 없듯이 가톨릭과 공산주의와는 워낙 불구대천의 원수다... 보라! 그들은 인류의 교묘무쌍한 선전방법과 이른바 공수표(허위약속)로써 우리를 패망의 구렁으로 호려가지 않는가... 아니!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바로 가톨릭의 신앙행위이다... 모든 국가의 중책을 지니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천주께 기구하기를 간청할 뿐이다."


▲ 죽산 조봉암
이는 이승만 무법정권의 백색테러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는 측면과 아울러, 흉흉한 민심을 타고 다시금 사회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1956년 대통령 선거 당시에 유효득표의 23.8%나 얻었던 조봉암은 여세를 몰아 그해 11월 10일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애초에 진보당 창당준비위원회 발기취지문은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을 반대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하였으며, ‘수탈없고 계획적인 경제정책’을 내세우며 현체제에서 모든 피해대중의 단결을 촉구했던 것이다:

"... 우리는 민족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분연히 일어났다. 우리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진보당은 창당 이후 反이승만주의를 넘어 자유당과 민주당이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보수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선택을 민중들에게 제시하여 창당 1년만에 자유당, 민주당과 함께 3대 정당으로 급성장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이승만 독재정권과 보수야당인 민주당, 그리고 반공주의 이념집단을 자처하던 천주교회에게 충격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이승만 독재체제와 제휴하고 “국가의 중책을 지고 있는” 정치권력에게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대응을 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반공”이 바로 민주화를 비롯한 그 어떤 과제보다도 우선시 되었던 것이다. 결국 1958년 1월 12일, 진보당 위원장 조봉암과 간부급 10여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으며, 1959년 7월 31일에 조봉암은 사형을 당하였다. 이후 대법원 판결에서 모든 관련자가 무죄로 석방되고 ‘평화통일’에 대한 주장도 적법하다는 결과가 나온 것을 보면 조봉암은 정치적으로 희생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남한 천주교회에서는 1958년 11월 14일, 요셉 까르댕 몬시뇰이 한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 (J.O.C)’를 창설하였다. J.O.C는 “공산주의가 유물론적 사상으로 노동자를 단련시키는 노동운동에 대결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가톨릭정신에 입각한 노동”을 하도록 조직한 것이다. 즉, 반공적 노동단체의 설립을 꾀한 것으로 볼 수 있다.(한국지부장: 캐롤 안 주교, 지도신부: 박성종 신부)

이승만정권의 교회탄압 : 경향신문 폐간사건

조봉암 사건이 대충 일단락되고, 장면은 부통령으로서 계속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이승만이 연로했던 까닭에 갑자기 이승만이 죽게 되면, 부통령인 장면이 대통령을 대행하게 되는 까닭에 장면은 자유당 세력으로부터 극심한 감시와 위협 속에 놓여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톨릭교회의 밑바닥에서는 줄곧 反이승만적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천주교회의 反이승만노선은 결국 1959년 4월 30일, ‘<경향신문> 폐간 사건’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공보실장이었던 전성천이 <경향신문>을 군정법령 제88호 위반으로 폐간조치시킨 것이다.(폐간 직전 경향신문은 20만 1천9백여부를 발행하는 영향력있는 신문 중 하나였다.)

▲ 1959년 4월 30일 밤 10시 50분께 서울 소공동 경향신문에 이승만 정부가 천주교 서울교구 유지재단이 운영하던 경향신문에 전격 '폐간'을 통고. 이로써 해방 이듬해 서울대교구장 노기남(1902~84) 대주교와 윤형중(1903~79)ㆍ양기섭(1905~82) 신부가 주역이 돼 창간한 경향신문 발행 중단은 해방 이후 최대 언론탄압 사건으로, 이후 1년간에 걸쳐 한국언론사에 길이 남을 법정투쟁이 이어진다. 4ㆍ19 혁명 이후 대법원 결정에 따라 361일 만에 속간됐지만, 2년 뒤 1963년 경영권이 이준구씨에게로 넘어가며 경향신문은 천주교회의 손을 떠난다. (사진출처/경향신문50년사)

폐간사유는: (1) 1월 11일자 석간사설에서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라는 제목의 정부비판기사가 실리고 (2) 2월 4일 조간에 허멘스 교수의 “다수의 폭정”을 인용한 「여적」이라는 기사가 실렸으며 (3) 2월 16일자에 조간에 「사단장은 기름 팔아먹고」라는 제목으로 박모 준장에 대해 보도하였으며 (4) 당국의 게재금지 요청에도 불구하고 「간첩 하(河)를 체포」라는 기사를 실었고 (5) 4월 15일자 석간에 이승만의 기자회견 보도를 통하여 허위 사실을 유포하여 사회의 안전과 공공복리에 폐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자 1959년 5월 1일 <경향신문> 폐간에 대하여 주미대사 월터 다울링이 “1946년도의 미군정법령은 그당시 심각하던 공산주의자들의 전복적인 선전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목적을 명확히 가진것”이라면서 “미국의 여론은 또한 신문에 대한 탄압이 신문의 과오에 대한 요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오랫동안 지지해왔다.”고 이승만정부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미 국무성 대변인은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가 미군정법령 88호의 규정에 의거하여 서울에 있는 <경향신문>을 폐간시켰다는 보고서를 접수하고 우려하고 있다”고 발표하면서 주미대사의 성명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경향잡지> 1959 6월호 194-195쪽 참조)

뿐만 아니라 <경향신문> 폐간의 부당성을 제기하는 문화인 33인의 성명, 한국가톨릭문필가 협회 성명(1959년 5월 10일)이 발표되었으며, 각 3대 일간지인 조선, 한국, 동아일보는 이 문제를 대서특필하며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편 <가톨릭청년>에서는 윤병희가 「언론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격렬하게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언론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리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이 언론자유가 부당하게 탄압되는 경우에 그것은 인권을 유린하는 불의가 감행되는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부당하게 억눌리는 곳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이미 민주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장송곡이며, 전제와 독재주의로 옮겨진 증좌인 것이다... 만일 정부가 끝까지 자기 과오를 고집하고 그 시정을 거부한다면, 창간 13년의 역사를 통하여 반공투사와 진리와 정의 전달의 公器로서 국민의 등불이 되어왔던 <경향>을 희생 매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이러한 억울한 희생은 반드시 헛되지 않을 것이며, 불의와 독선이 거꾸러지는 날 부활과 소생의 더욱 찬란한 영광을 차지하고야 말 것이다.(<가톨릭청년> 1959년 6월호 16-20쪽 참조)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이승만정권과 장면을 위시한 천주교회는 적대적인 관계로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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