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15 /1970년대]

1970년대의 한국사회와 민중운동 진영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고 조건을 제공한 사건은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과 가공할 유신정권의 폭력성이다. 대다수 민중들에게 영적, 육체적 죽음을 강요하던 체제하에서 전태일의 죽음은 사회적 불의를 가장 강력히 고발하는 예언적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유신독재의 등장과 전태일 분신자살 사건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5천 명 안팎의 전국 동면 단위에서 뽑혀져 올라온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의원이 뽑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이제까지 대통령 직접선거를 뒤엎는 간접선거이며, 대의원은 정당인이 될 수 없고 또한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사실상 관권에 의한 선거를 제도화한 법이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의 1/3을 임명하고 법관을 임명하도록 되어 있어 입법, 사법, 행정 3권을 완전히 대통령이 장악했다. 행정은 물론이요 법률을 만들고 없애고 뜯어고치는 것도 세금을 매기는 것도 돈을 찍어내는 것도,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죄를 주고 죽이고 살리는 권한마저 대통령이 독차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독재의 명분을 경제개발에서 찾았다. 경제성장이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과 소외 위에 이루어지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노동자들의 항의가 이어지기 시작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로 본격적인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적 항의운동이 뒤따르게 된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종업원을 대상으로 노동조건을 조사하였는데 평화시장 재단사의 96%가 하루 13시간-16시간까지의 과중한 노동을 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기관지 계통의 질환, 신경성 위장병에 걸려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태일은 1970년 10월 7일 노동청을 상대로 작업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1969년 11월경 전태일이 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쓴 진정서를 보면 당시 청계 평화시장 내 봉제공장의 열악한 근로조건과 노동자들의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전태일의 간절한 원망을 여실하게 볼 수 있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4시간의 작업시간을 단축하십시오.
1일 10-12시간으로.
1개월 특(휴)일 2일을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희망합니다.
건강진단을 정확하게 하여 주십시오.
시다공의 수당 현 70원 내지 100원을 50% 이상 인상하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기업주 측에서도 충분히 지킬 수 있는 사항입니다.
... ...
성장하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의 고된 작업으로 경제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밑거름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의류계통에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잘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 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매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마른 인정을 합리화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 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내심 존경하시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바삐 선처있으시기를 바랍니다."(<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 돌베개,138-139쪽)

▲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편지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달라는 농성과정에서 경찰이 이를 제지하자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후 분신자살을 하였다.

이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은 이 당시 민주화 운동의 주축을 이루던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학생들은 노동문제, 노동운동에 대하여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즉,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연대성이 주장되면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반정부 투쟁에서 노동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는가 하면, 그들 자신이 노동자가 되어 노동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 노동운동은 그리 발전된 상태가 아니었고, 노동운동 자체도 “우리도 인간답게 살게 해다오”라는 인권운동의 차원에서 특히 개신교회의 관심을 끌었다.

70년대 교회 인권운동의 시발 : 원주교구 부정부패 추방운동

그러나 전태일의 죽음은 한국가톨릭 교회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1967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 이후 교회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교회와 구체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이 결부되지 않는 경우에 가톨릭교회는 비교적 냉담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한국가톨릭교회가 1970년대에 다시금 사회문제에 대하여 심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원주 문화방송 설립에 따른 교회와 관권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다.

▲ 김수환 추기경과 지학순 주교의 젊은 시절
원주 문화방송국은 1970년 5.16장학회와 원주교구가 60대 40의 투자비율로 공동설립하였다. 1971년 3월 운영실태를 감사한 결과 세금조차 내지 않은 부정이 드러나 교구는 운영을 맡고 있는 5.16장학회에 대하여 수차 시정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권력을 내세워 교회의 요구를 무시하였다. 이에 교구 성직자와 평신도 대표는 연석회의를 열고, 교구가 투자한 돈이 문제가 아니라 권력만 믿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제도화된 불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키로 결정을 보았고, 이에 따라서 1,500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일치하여 일대시위를 벌인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지학순 주교는 가톨릭교회에서 시사지로 발간하던 <창조>지에 “부패의 실상과 사회정의”라는 기고문을 통하여, 교회가 억울한 민중을 대변하여야 행동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 일부 부패된 무리들이 여당과 야합하여 제대로 야당 구실을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민중의 올바른 힘을 모아 떳떳한 민주적 힘의 집단체로서 필요시에는 민중의 힘을 과시하며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의 횡포를 최대한도로 막고 이 나라의 주권을 보호하는 통제세력이 있어야 하겠다고 느껴왔다.

나는 늘 이런 마음에 이런 충격을 느끼며 언젠가는 힘차게 일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이 나라 이 백성을 위해서 교회가 명하는 지상과제를 수행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가톨릭 주교라는 지위에 있는 내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부패분자들이 자행하는 불의를 당했는 데 일반 서민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억울한 무수한 서민들을 대표해서 교회가 힘있게 일어서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도시주변의 하수구와 같이 권력층에 썩은 물이 범람하는 꼴을 보고도 말 못하는 교회라면 교회는 죽은 교회라고 생각했다."(<창조> 1971.11)


원주교구가 지학순 주교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대응에 나서자 천주교 주교단에서도 적극 지지를 표명하였다. 아직 제 2차 바티칸공의회로 말미암은 사상적 혼란과 불투명한 현실적 판단 속에서는 입심이 강한 부분에 이끌려가는 법이다. 특히 이 시기의 교회는 나름대로 젊은 교회로서 쇄신의 기운이 충일한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주교단은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라는 제목으로 1971년 평신도의 날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하였다.

"순수한 양심을 지키고 따르기 위해서는 온갖 고통과 희생을 각오해야 하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그리스도의 인류구원을 계속해야 할 크리스찬도 사회를 떠나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소의 현세적인 손실이 있더라도 때로는 부당한 간섭과 모욕을 당하더라도 교회가 먼저 솔선해서 양심적 생활을 보여주고 모든 특혜를 버리고 뇌물 및 유혹을 용감히 물리쳐야 하겠다. 교회는 세속과 타협할 수 없다. 자신의 부정부패 요소를 말끔히 청산하고 우리 사회를 혼란케 하는 온갖 부정부패를 없애는 데에 앞장서야 하겠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는 순수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이 사회에 하루빨리 사랑의 나라가 건설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 전태일은 문익환 목사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을 만들어준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의 초판본에서 "전태일은 우리시대의 예수"라고 추천사를 썼다.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뭐 다르겠느냐
우리의 이름도 전태일이다
깊은 땅 속에서 슬픔처럼 솟아오르는
물방울들아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우리의 이름이라고 들어야 알겠느냐
한국 땅에서 솟아나는 물방울치고
전태일 아닌 것이 있겠느냐

가을만 되면 말라
아궁에도 못 들어갈 줄 알면서도
봄만 되면 희망처럼 눈물겨웁게 돋아나는
이 땅의 풀이파리들아
너희의 이름도 전태일이더냐
그야 물으나마나 전태일이다

청계천 피복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너희의 이름이야 물론 전태일일 데지
여부가 있나
우리가 전태일이 아니면
누가 전태일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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