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천주교현대사-4]

한국전쟁은 무려 4-500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남겼다. 이것은 남북한 인구 3천만 명의 약 1/6이었다. 전쟁이라는 초폭력적 상황아래서 강제된 죽음을 목전에 두고는 사회경제적 차이와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평등해질 수 밖에 없었다. 정치적 선택에 따라 언제라도 적이 될 수 있었고, 관계의 역전이 가능했다.

남북한 모두는 그들 사회의 자발적 발전을 가능하게 할 사회경제적 기반이 완전히 붕괴되고 남은 것이 없었다. 이러한 파괴의 기본요인은 물론 미군의 폭격이었다. 특히 북한지역은 피해가 더 심했는데, 전쟁이 끝났을 때, 북한의 생산력은 1949년과 비교하면 전력공업은 74%, 연료공업은 89%, 야금공업은 90%, 화학공업은 77%가 파괴되었으며, 철광석, 시멘트, 화학비료 생산시설 등은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전쟁이 역설적이게도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켰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성과 잔인성을 동반하면서 진행된 전쟁은 점령과 수복, 보복과 반보복,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면서 서로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증오심을 각인시키며 남북한 체제의 분단구조와 분단의식을 내면화시켜 갔다. 이제 상대방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만 타도되어야 할 대상일 뿐, 동족이라는 의식이 끼어들 사치스런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북한의 경우에 정치적으로 전쟁과 전후 복구과정을 거치면서 김일성에 의한 단일 사회주의 독재체제가 형성되었다. 전쟁 전 북한의 주요 정치세력이었던 중국과 소련 출신의 공산주의자와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 공산주의자들은 전쟁기간의 여러 오류들과 일련의 반김일성 움직임에 연루되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김일성 세력에 도전할 수 있는 여력을 상실하였다.

전쟁은 북한의 생산력 기반을 완전히 무로부터 새로이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인간의 노력을 중시하는 '사람 중심의 주체사상'이 강조되었다.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행한 ‘모든 것을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라는 유명한 연설을 통하여 ‘중공업 우선과 경공업, 농업의 동시적 발전’ 노선을 시행하였다. 이 경제발전 노선은 대중들의 자발성과 국가와 당의 지도력으로 상당한 성과를 얻게 되면서 짧은 시간 내에 북한전역을 전쟁의 폐허로부터 탈출케 하였다. 인민들의 생활은 향상되었고 사회의 생산력은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더구나 전쟁과정에서 무차별 폭격과 공격, 그리고 미국과 피나는 전투로 인해 생겨난 북한의 지도부와 주민들의 반미감정은 가장 강력한 체제 근거 이데올로기가 될 만큼 일반화되었다. 전후 북한 지도부는 ‘조국의 철천지 원수 미제에 대한 반대와 불타는 적개심’을 체제건설과 동원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 여기서 ‘미제의 주구’로 침략을 자행한 ‘남조선 괴뢰도당’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도 마찬가지로 내면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때문에 북한에서 교회는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천주교회는 구월산 유격대 등으로 편성되어 인민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철저히 단죄의 대상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민들이 전적으로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됨에 따라서 비교적 협조적이었던 기독교도연맹 등 개신교 세력들도 종교활동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전후 분단고착화와 남한교회의 반공이념 내면화 과정

정치적으로 한국전쟁은 남한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반공 독재체제 중의 하나로 완성시켜 주었다. 이미 이승만과 그의 정권에 도전할 수 있는 명분과 힘을 가진 집단과 조직은 하나도 없었다. 좌파세력과 평화통일 세력을 비롯한 모든 체제 반대세력은 소멸되었고, 오로지 친남한-반북한 세력들만이 존재할 수 있었다. 전쟁은 남한에서 진보세력, 또는 민족주의 세력의 절멸을 가져왔다.

반공은 전후 남한정권의 ‘고갈할 줄 모르는 정당성의 원천’이었다. 반공은 일반인과 시민사회의 일상생활에까지 살아 기능하는, 마치 국민정신과도 같았다. 반공이 가장 중요한 체제근거이자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최소한의 민주화운동이나 반독재투쟁 조차도 탄압당했다. 한국의 군부와 경찰 그리고 관료사회는 전쟁 전까지도 일제시대의 친일경력으로 인하여 민중에 대해 적극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이제 친일문제는 반공의 위세아래 소멸되었다.

이에 따라서 남한 천주교회는 반공 선전을 위한 교회 언론매체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1953년 9월, 半월간지 <가톨릭신보>를 <가톨릭시보>(주필 이효상)라는 주간지로 전환시켰다. 이 당시 교회에서 정부에 제출한 변경신청서를 살펴보면, “반공이론의 계몽선전과 국민사상 선도를 목적하고 발족한 본지는 창간 당시의 재정사정으로 주간으로 출발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나 이제 앞으로 전개될 더욱 치열한 사상전에 대비하여 본래의 사명에 가일층 충실하기 위하여 발행회수를 증간하여 주간지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한국전쟁 기간동안에 반공언론매체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던 <천주교회보>에서는 1953년 5월 15일자에 「노동운동과 교회」라는 논설을 통해 공산주의가 노동계에 침투하여 폭력과 살상을 선동, 마침내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경고하였다. 뿐만 아니라 ‘對 공산주의 기획논설’로서 백득로가 「공산이론의 허구성」(연 3회), 「공산사회의 운명」(연 3회), 「자본주의의 해악」(연 2회), 「사회재건의 관건」(연 4회)을 게재하여 반공 지상교육을 실시하였다.

주교회의에서 발행하는 <경향잡지>에서는 호교론적 차원에서 동학당과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였다. 

신부님께서 또 동학당과 공산당과의 유사점이 무엇인지 물으셨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증오와 남의 재산을 탐내고 악정(惡政)이라는 구실하에 기존질서의 전복 등 요컨대 “내가 들어가기 위하여 거기서 남을 내쫒는 정책인 것입니다”(<경향잡지> 1953. 12월호 「동학란의 회고」 바오로 우신부 기고문 114-1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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