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현대교회사-11]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

1960년대 외국선교사 급증, 교회에 새로운 활력 불어넣어

한국천주교회는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에 걸쳐 외국인 선교사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현상을 경험하였다. 그 증가 상황을 살펴 보면, 1953년에는 87명, 1957년에는 156명, 1959년에는 199명, 1962년에는 270명으로 늘어났다. 반면에 한국인 성직자의 증가는 1953년엔 159명, 1962년에는 327명으로 이보다 조금 둔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외국선교사의 증가원인은 첫째, 태평양전쟁 당시에 일제에 의해 추방되었던 수도단체나 선교사들이 해방 이후 특히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다시금 국내에 유입되었고, 둘째, 한국전쟁으로 인민군에게 납치되어 갔던 프랑스인, 그밖의 외국인 성직자, 수도자들이 1953년 휴전을 전후해서 석방되었으며, 그들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한국으로 다시 나와서 전교 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포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남한의 왜관에 터를 잡고 그곳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세째, 50-60년대에 걸쳐 급증하던 신도들을 한국인 성직자들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한국 교회가 외국선교사들을 적극 요청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러한 해외 선교사의 파견은 특히 1960년대에 걸쳐 교황청의 권유에 따라 붐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인식해야 할것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 수도회의 활동은 직접 선교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외국교회의 사례를 살펴보면, 수도 단체들의 경우, 직접 선교보다는 교육, 사회복지사업 등 간접 선교에 치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간접선교가 교구사제의 본당사목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선교사 파견이 왕성했던 1920년대 후반기부터 각 본당으로부터 전교 수녀 파견 요청을 받게 됨에 따라 주로 본당사목을 돕는데 투여된 것이다.(「휴전 이후 한국천주교회상」 조광, <교회와 역사> 172호 16쪽 참조)

이러한 수도회의 사목방침이 한국교회의 기형적 발전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교회는 줄곧 외국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본당사목에 치중해왔다. 그 결과 간접선교부문(매스컴, 의료사목, 빈민사목, 노동사목, 농민사목, 교정사목 등)이 취약하였기 때문에, 한국인 성직자들이 늘어날수록 본당사목에서 밀려난 선교사들은 다른 할 일을 찾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지금도 수도회보다는 교구사제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간접선교는 큰 비중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선교사들은 교구사제들보다 세계교회의 추세에 민감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교구사제나 주교들보다 더 신속하게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1960년대 중반 이후 외국인선교사들은 한국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새로운 새대의 선교사들 한국에 

파리외방전교회는 초대교회 이후 줄곧 한국교회의 정신적 지주이자 사목관리자 노릇을 해왔지만 1960년대에 이르면 이미 교회 안에서 그다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본래 이 선교회의 목적은 방인성직자 양성이었는데, 한국인 성직자들이 급증하여 대부분의 사목을 맡았기 때문이다.

1958년 대구교구의 서정길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북부지역을 맡아주길 요청하였다. 이 지역은 그 이후 10여 년 만인 1969년에 안동교구로 승격되어 두봉(Rene Dupont)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두봉(Rene Dupont)주교는 1967년에 이 선교회 제 3대 지부장이 되었으나 안동 교구장으로 임명을 받는 바람에 지부장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신설된 안동교구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건물이 첫 교구청이 되었다.(같은 해에 최세구(Robert Jezegou)신부가 4대 지부장으로서 임무를 맡았다.)

한편, 1953년에는 젊은 회원들이 한국에 도착하게 되면서 이 선교회에도 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어왔다. 그 이전에 있었던 젊은 회원의 마지막 파견은 193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바, 새로 온 이들은 그들과 같은 세대가 아닌 것이다. 노장 선배들은 우선 자신들에게는 엄격하고 타인들에게는 까다로왔던 ‘얀세니스트’(Janseniste)의 기질을 갖고 있었지만 새로 유입된 선교사들은 새로운 세대였다.

게다가 1950년까지 파리 외방전교회의 기본 목표가 신자양성과 비신자 개종 및 방인 사제 양성이었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8년에 가진 총회에서 사제 뿐 아니라 평신도들의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당사목과 아울러 노동사목/농민사목에도 관여를 해 왓다. 그러나 점차 그 영향력이 퇴조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하겠다.(「해방 이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활동」, 배세영, <교회와 역사> 137호 10-12쪽 참조) 

바티칸공의회, 미국교회에 격변 일으키다

1960년대는 미국사회에도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는 시기였다. 민주당의 케네디 대통령이 인권외교를 주장하는 가운데, 바티칸공의회의 결과가 미국교회에 일으킨 파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미국교회가 겪는 갈등과 변화는 곧바로 미국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선교회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특히 해방 이후 한국교회에서 종교적, 정치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메리놀선교회의 1960년대 이후 사목정책의 변화를 살펴보려면 미국교회의 변화를 검토해 보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여기서는 1968년 <사목>지에 실렸던 기사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는 자유에 대한 인식이 점점 제고(提高)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주교들이 관대하다는 말에 이견을 갖고 있다. 그들은 개인 또는 집단에 대한 주교들의 빈번한 전제적인 탄압을 상기한다... 자신의 처지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신부 수녀들은 자신이 발한 서원에 구애됨이 없이 홀가분하게, 그리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성직을 떠나 평신도의 생활로 들어간다. 평신도, 성직자 할것없이 주교의 승락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이 그룹을 조직한다. 그룹을 조직하는 목적은 솔직히 말해서 정치적이다. 어떤 사람은 압력을 가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그들이 찬성하는 정책이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성직자 독신제의 철폐를 위해,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구조를 민주화하기 위해, 또 어떤 사람들은 미국의 월남정책을 신중히 평가하기 위해 각각 그룹을 만든다...

미국의 가톨릭교회는 구원의 조직이었다. 그 신학자들은 결의론(決疑論)이나 호교론을 전공했으며, 미국의 가톨릭 사상은 엄격히 스콜라적, 로마편향적, 수세적, 反현대적인 것으로서, 거의 전적으로 미국적 환경의 현실을 외면한 것이었다.

...개혁을 시사하는 사람들은 에드워드 쉴레벡스 신부의 추산에 의하면 12명의 주교 정도이고, 핼리난 대주교에 의하면, 267명중 3-40명정도이다.

미국교회의 가장 현저한 문제점은 그 전문가, 즉 성직자의 위기다... 153개 교구중 110개 교구에서 지난 2년간 최소한 711명의 신부들이 성직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현재 미국 성직자 수는 59,803명이다.

미국 가톨릭중 수녀들은 개혁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여 제일 큰 발전을 이룩한 집단이다. 공희회 전부터 ‘수녀자질향상운동’을 벌여 공의회의 변화를 잘 수용할 수 있었다."(「미국교회의 고민」 <사목> 1968.11 76-86쪽 참조)


한국사회의 문화와 복음적 요청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한국 메리놀 선교회

1966년 8월부터 1월에 걸쳐 메리놀 선교회는 뉴욕에 있는 본부에서 제 5차 총회가 개최되었다. 11명의 지부장과 11개의 전교국에서 선출된 24명의 대표들이 과거 10년간 행한 사업을 검토하고 재평가하며, 신임 임원을 선출하기 위해 모였다. 회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룬 것은 메리놀회의 목적과 기능을 다시 연구하는 과제와, 구체적인 방법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행하는 과제였다.

메리놀회 한국지부는 1967년 4월 한국에서 일하는 회원들이 모여 5개년계획을 수립하려고 토론한 결과, 9개의 위원회를 만들었다. 여기서는 실태조사, 미래 사업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과 지침, 그리고 5개년에 걸쳐 시행할 구체적인 계획안을 각각 짜도록 요청하였다.

특히 사회경제위원회(위원장 모 토마스 신부)는 인간복리와 사회경제 심리학적, 문화적 발전을 증진시키는 모든 사회경제 사업계획(지역사회 개발, 보건문제, 사회정의, 노동문제 등)을 연구하여 재평가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사회공보위원회에서는 예비 실태조사한 결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한국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많이 들어왔다. 그들은 지금 그것을 입증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종교방송에서 우리가 누구누구는 그리스도교를 믿고 교회에 잘나오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복음성서의 사회개혁에 대한 증거를 방송망을 통해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한국인에게 가톨릭의 광범위한 복음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개념을 가르쳐주려고 한다. 그 복음은 신자나 비신자에게 다같이 흥미와 교훈을 주고 공통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복음에 대한 여러가지 문제를 다룰 것이다. 즉, 자비, 봉사, 희생, 고난의 참뜻, 인류고난에 대한 신자들의 반응, 노동과 사회복지 문제, 기업윤리 등에 관한 것이다." (<사목> 1967.11 142-146쪽 참조)

이러한 메리놀 선교회의 자체 평가를 볼 때, 메리놀회의 제 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과 사목방침에 얼마나 충실하려고 노력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사실상 공의회에서는 지역사회의 문화와 복음적 요청에 귀를 기울이고 적합한 사목활동을 전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직접선교 방식보다는 복음적 증거를 통하여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만드는 ‘구원의 표지’로서의 교회론에 기초하여 간접선교에 나서도록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결과 메리놀 선교회는 한국사회의 가난과 억압의 참상을 구조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한상봉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