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구’의 일인가, ‘한국천주교회’의 일인가? 5면에 박스기사로 ‘제30회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제’가 천진암성지에서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아울러 미사를 통해 초기 신앙 선조들의 시복시성을 기원했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다. 현재 여러 교구가 각 지역의 신앙 선조 중 의미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시복시성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
‣ 사설은 얼굴이다. 신문사의 ‘사설’(社說)을 굳이 말로 풀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밥 먹는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한마디로 신문사의 주장이며 관점이다. 우리는 그 사설로서 신문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 무엇을 생각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5월과 6월 두 달간의 교회신문의 사설을 살펴보자. ‣
‣ ‘당신 뜻대로 내게 이뤄지소서’ 또 ‘이 분’인가? 를 몇 번이나 웅얼거리다 글을 쓴다. 지난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과 관련하여 천주교회에서는 보기 드문 순발력으로 나온 4월 30일자 서울대교구 대변인의 「가톨릭인사 ‘친일명단’ 발표에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서와 이를 보도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6월 22일)을 맞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는 17일부터 25일까지 ‘갈라진 겨레의 화해와 일치’를 지향으로 기도운동을 전개한다. 마침 교회신문들은 6월 8일자에 ‘북한주민 아사를 막기 위한 긴급지원을 촉구하는 종교 사회지도자 기자회견’을 보도한 바 있다. 은 6월 8일 20면 ‘북한 주민 위
교회의 ‘친일문제’를 끝내고(?) 5주 만에 평상으로 돌아오니 나라 안이 쑥대밭이다. 아니 쑥대밭이 아니라 인공운하에 둥둥 뜬 미국산 쇠고기 밭이다. 이에 대한 교회언론의 관심 역시 적지 않다. 문제는 관심의 질이다. 청소년들이 시작한 ‘촛불’과 마이크 앞에서 끝내 울어버리는 소녀들의 말이 ‘시대의 징표’이자 ‘언론’이 새겨야 하는 길이다. 그런 세상의 소
한국천주교회의 ‘원죄’가 되어간다. 와 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에 대한 교회신문의 반응을 네 번째로 비평한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네 번씩 연재를 하는 것은 교회신문이 보인 보도관점이 참으로 어이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친일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교회와 교회언론이 회피하면 할수록 이 문제는 한국천주
경성교구장의 담화문이 ‘추상적이고, 소극적인’ 친일 행각인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지난 4월 29일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에 대한 교회신문의 반응을 세 번째로 비평한다. 지난 주 우리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1942년 발표된 조선인 ‘오카모토’ 경성교구장 담화문중 하나를 살펴보았다. 그런 류의 담화문과 교회의 공식
경성교구장 ‘오카모토’ 신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의 성(姓)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는 ‘창시개명’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슬프고도 아픈 과거를 똑바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창피해서야 어디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일본인에게 그 시대의 과오를 거듭 요구한다고 짜증내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이제는 “후벼 파지 말라”
교회는 친일 했지만, 개인은 친일하지 않았다! 5월 11일자 교회신문들의 사설은 이렇게 적어야 솔직한 것이다. 그것이 말하고 싶은 결론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5월 11일자 신문을 장식한 ‘친일명단’에 대한 교회신문의 기사를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불
▶ 「커버스토리」눈에 ‘확’ 들어온다. 은 1월 1일자 2580호에서 올해를 ‘문화’와 ‘영성’의 두 축을 중심으로 삼아 다양한 기획을 마련한다고 말한 바 있다. 두 테마를 풀어가는 기획으로서는 ‘바오로 로드를 가다’, ‘쉽게 보는 교회미술/ 쉽게 듣는 교회음악’,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 ‘2020 한국교회를 말한다’, ‘미디어 교육’등을
▶ 노동자 ․ 근로자 ․ 직장인 노동절을 맞아 두 교회신문은 모두 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은 13면 ‘근로자의 날 탐방-서울대교구 직장사목부’를 실었고, 은 10면 ‘근로자의 날-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실었다. 돌이켜 살펴보자. 과연 교회신문은 인간이 행하는 ‘노동’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교
직접 취재에 의한 것이 아닌 인용이나 간접취재에 의한 기사는 솔직 담백해야 한다. 기사의 원천자료를 입맛에 맞게끔 ‘짜집기’하다 보면 의미전달이 달라질 수도 있다. 물론 기사분량을 맞추다보면 원천자료를 줄일 필요도 있고, 기사 제목도 달리 표현 할 수 있지만 원천자료에 감정이입 되어 그 농도가 ‘찐’해지면 독자는 의미도 모르면서 취할 수밖에 없다. 4월 2
한참 일본식민시대가 무르익던 1935년에 나온 심훈의 란 소설은 해방 후 세대에게는 ‘계몽소설’이란 이름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그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박동혁과 채영신이란 이름은 ‘열정’과 ‘헌신’이란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지금도 서울 지하철 4호선을 타면 소설의 배경이기도 했던 경기도 안산에 ‘상록수역’이 있다. 역 근처에는 채영신의 실제모
가 한 가지 주제로 글을 적으면 편한데 두 가지 주제를 만날 때는 난감하다. 주제의 연관성을 차치하더라도 글의 분량에 대한 고민도 해야 한다. 그렇지만 어쩌랴 좀 더 나은 교회신문의 모습을 기대하며 이번 주도 두 가지 꼭지가 비평을 기다린다. ▶ 이주사목, 지혜로운 사목이 되기를 주교회의 이주사목위원회 홈페이지(http://www.cpcm
‣ 교회의 ‘기관지’ 이 창간 81주년을 맞이했다. 축하할 일이다. 정부수립이 60주년인 것을 감안하면 한 눈에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순탄치 않은 세월을 교회의 언론으로서 꾸준히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다. 3월 30일자 2592호는 ‘창간 81돌 특집’으로 다양한 기획기사를 실고 있다. 또한 2면에는 신문사의 사장인 이창영 신부가 창
‣ 총선 참여와 사회 복음화의 상관관계를 논하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의례적으로 사용하는 말은 많다. 마음에 있는 말이든 혹은 마음에 없는 말일지라도 시기에 따라서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의례적인 표현이라면 굳이 듣는 사람들은 그 말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하물며 언론이야 그런 감각은 뛰어나다. 그것이 뉴스가치에 대한 판단일 거다.
이번 주에는 지난 주 미디어 비평에 대한 답을 주는 듯한 보도가 있다. 지난 주 필자는 ‘천주교 교우인가,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인가?’의 마무리에 이런 글을 적었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느냐보다 각 종교의 가치를 의정활동과 국정에 어떻게 실현하느냐를 교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교회언론의 중요한 몫이다.” 그러기에 어느 종
이명박정부가 출범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국회 본청 앞에서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을 갖고 5년 임기의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시작했다. 또한 새 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일 할 각 부처 장관 내정자에 대한 명단은 이미 대통령당선자로서 2월 19일에 15명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몇몇 장관은 국회 청문회 이전에 사퇴를 했고, 현재(3월 1
기사를 작성하는 기자가 보도 자료에 의존할 때도 있고 혹은 현장에서 취재한 것을 바탕으로 쓸 때도 있다. 어떤 경우가 되던 기자는 단순한 사실보도를 하더라도 기사거리에 대하여 다양한 취재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기사를 편집부로 넘겨서 제목을 딸 때에도 (혹은 신문사에 따라 기자가 직접 정하기도 하는 제목이) 자신의 의도와 맞는지 혹은 기사의 내용과 제목이
새 정부가 출범한다. 새로운 것은 늘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설레임이라는 아름다운 단어와 낯설음이라는 수줍은 단어가 봄이라는 계절과 어우러졌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대선과정의 우여곡절을 차치하고 새 정부의 출범이 국민에게 희망과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정부가 내건 단 한 가지 구호가 교회신문의 태클에 걸렸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