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3월 30일자 2592호 <가톨릭신문>과 963호 <평화신문>이다.



‣ 교회의 ‘기관지’

<가톨릭신문>이 창간 81주년을 맞이했다. 축하할 일이다. 정부수립이 60주년인 것을 감안하면 한 눈에도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순탄치 않은 세월을 교회의 언론으로서 꾸준히 역할을 수행해 온 것이다. 3월 30일자 2592호는 ‘창간 81돌 특집’으로 다양한 기획기사를 실고 있다. 또한 2면에는 신문사의 사장인 이창영 신부가 창간기념사를 독자들에게 말했다. 신문사의 대표인 그는 교회언론의 소명에 더욱 충실할 것을 약속하고, 때마침 맞이한 사도 바오로의 해를 징표로 해석하며 100주년을 향한 걸음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어서 그는 교회언론에 대한 비판적 지적을 성찰하면서 말했다.

“이러한 정체성에 바탕을 두고 저희는 가톨릭신문이 교회의 ‘기관지’임을 자임합니다. ...(중략)... 본질적으로, 교회 신문은 언론인 동시에 교회가 그 고유한 소명의 필요성에 의해 발행하는 교회의 기관지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말하고 지향하는 기관지는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과 실수까지도 덮거나 미화하는 구태를 행하는 그러한 시대착오적인 나팔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기관지는 교회 안의 거룩한 권위에 따라 전해지는 교회의 가르침을 알려주며, 가치관의 부재 속에서 참된 권위와 가치를 지닌 것을 식별해주며, 사람의 가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를 전파한다는 의미에서 기관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신문은 그 참된 의미에서 기관지로서의 소명을 더욱 충실하게 수행해야 할 것입니다.”

신문사를 대표하는 사장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독자로서 사장의 약속을 기대하겠다. 교회의 ‘기관지’가 지니는 한계성보다는, 그가 말하는 교회의 ‘기관지’ 로서의 소명 역시 녹록치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전히 「아죠르나멘토」(aggiornamento)는 진행 중이며, 「기쁨과 희망」은 교회공동체의 삶과 방향을 찾는 ‘새로운 눈’이다. <가톨릭신문>의 창간81돌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 우리는 어디서 ‘부활’을 체험하는가?

교회 전례의 우선순위로 따지자면 부활 이상 가는 것이 없다. 교우가 아닌 분들은 때때로 성탄이 높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성탄전례는 성삼일 예절보다도 우선되지 않는다. 그만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화두는 단연 ‘부활’이다. 그렇지만 부활절의 시간적 위치가 연말에 위치한 성탄절보다는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구성원들이 부활성야와 부활대축일을 지나고 나면 너무나 빨리 일상으로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공동체는 공동체대로 몇 가지 행사를 하곤 하지만 늘 그것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숨은 뜻을 주위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언론의 소임이다.

부활절 후 교회신문에 보도된 부활 행사는 빈약하다. <평화신문>은 네 꼭지를 실었다. 4면 포천 일동본당-주민초청 나눔 잔치, 5면 수원 시흥지구-가정성화 다짐하는 부활성야미사, 대전 태평동본당 부활음악회(예고), 서울 시흥5동 본당-거리에서 부활계란 나누기(사진). <가톨릭신문>은 특집기사에 밀렸는지 두 꼭지다. 3면 대전 태평동본당 부활음악회(예고), 31면 부산 중앙본당 -거리에서 부활계란 나누기(사진). 한 마디로 너무 야박하다. 물론 보도된 것이 다는 아니겠지만 계란만이 부활을 알려주는 것인가?

부활을 느끼고 펼치는 가짓수도 얼마 안 되며, 그마저도 보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것 같다. 전국의 수많은 교회공동체가 천편일률적인 부활행사를 한다는 것인가? 엠마오의 눈을 교회신문이 제시해 주어야 한다. 언론의 거울과 등불 역할은 경마장 보도에 안주할 수는 없다. 새 봄을 맞이하는 자연 속에서, 그리고 이웃들안에서, 우리들의 ‘지금여기’안에서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보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부활한 예수가 계신 곳, 그곳이 나의 부활을 체험할 장소인 것이다. 계란은 이제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돌려주고 계란을 품는 어미닭의 삶을 찾아보자.
 

/김유철 200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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