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4월 13일자 2594호 <가톨릭신문>과 965호 <평화신문>이다.


 한참 일본식민시대가 무르익던 1935년에 나온 심훈의 <상록수>란 소설은 해방 후 세대에게는 ‘계몽소설’이란 이름으로 다가왔다. 아울러 그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박동혁과 채영신이란 이름은 ‘열정’과 ‘헌신’이란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지금도 서울 지하철 4호선을 타면 소설의 배경이기도 했던 경기도 안산에 ‘상록수역’이 있다. 역 근처에는 채영신의 실제모델로 알려진 ‘최용신’의 기념관도 있다. 신문 모니터에 갑자기 웬 신소설 타령인가?

이번 주 <가톨릭신문> 10면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미국의 한 금연운동단체가 교황에게 바티칸을 세계최초의 ‘흡연 없는 나라’로 선포해 달라고 공개 요청” 했다는 상큼한 기사이다. 이어서 기사는 “바티칸은 최근까지 전 세계 ‘흡연자들의 천국’이었다. 2002년 공공장소 흡연금지 조치가 마련되기까지 바티칸 실내는 물론 공공장소에서도 흡연이 이뤄졌다. 성 베드로 광장이나 계단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는 가톨릭이 타종교에 비해 담배에 관대한 데다, 매일 세계각지에서 몰려드는 순례객들의 흡연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우리나라의 금연인구와 금연장소의 증가는 흡연자 혹은 애연가들에게는 위협적(?)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위의 기사가 별 재미없는 기사이겠지만 천주교회와 흡연은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래서 교회신문의 ‘계몽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친다’는 ‘계몽’이라는 용어가 촌스럽다고 생각되는 분들에게는 ‘캠페인’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이유로 담배를 죄악시 하여 개신교처럼 금지교리나 계율을 만들자는 것도 아니고, 건강상의 이유를 드는 의료차원의 처방을 내리자는 것도 아니다. 최소한 ‘장소’에 대한 고민을 하자는 것이다. 이제 어디서 담배를 피울 것인가? 바티칸을 ‘흡연 없는 나라’로 권장한 단체는 우리에게 좋은 화두를 준 것이다.

불교 사찰의 첫 번째 관문에 해당하는 일주문(一柱門)은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곳이다. 중생이 사는 세상인 세간(世間)과 깨달음의 세계인 출세간(出世間)이 나눠지는 곳이기도 하다.(출전: 문화원형 백과사전)

종교문화의 다름도 있지만 좋은 점은 서로 배워야만 한다. 불자들이 일주문을 들고날 때 일주문에 서서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은 그 외양만으로도 경외감이 앞선다. 우리 천주교회 앞마당은 어떤가? 성당마다 천차만별의 모습이지만 말은 성스러운 집, 즉 성당(聖堂)이건만 세간(世間)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성당마당은 나이와 관계없이 흡연자들의 천국이며, 결혼식과 같은 외부인(?)이라도 대거 오는 날에는 마치 우리는 아주 관대한 종교단체인 양 웬만한 행위에는 간섭조차 하지 않는다.

해인사 앞마당에서의 흡연과 명동성당 앞마당에서의 흡연을 동시에 상상하여 보라. 해인사 팔만대장경 앞에서 흡연하면 무식한 사람이고, 명동성당 성모동산 앞에서는 흡연해도 유식한 사람인가?

다른 측면에서 현재의 성당건물은 주일학교 청소년들에게는 학교와 교실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일반 학교에서도 학교를 방문하는 학부모는 물론, 교직원도 금연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천주교회 구성원들은 스스로 그토록 중요하다는 청소년들의 공간들을 어떻게 취급하고, 어떤 인식으로 흡연을 성당 구석구석에서 하고 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교회문화를 다시금 되새겨보고 개념 없는 나쁜 인습은 창피하더라도 ‘계몽’하자. 교회신문님, 채영신이 되어주세요.

/김유철 20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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