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3월 16일자 2590호 <가톨릭신문>과 961호 <평화신문>이다

 

이번 주에는 지난 주 미디어 비평에 대한 답을 주는 듯한 보도가 있다. 지난 주 필자는 ‘천주교 교우인가,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인가?’의 마무리에 이런 글을 적었다.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느냐보다 각 종교의 가치를 의정활동과 국정에 어떻게 실현하느냐를 교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교회언론의 중요한 몫이다.” 그러기에 어느 종교나 종교 창시자의 이념과 가르침이 박제된 도그마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의 삶이며 선택이다. 그것이 그 사람을 신앙인이게 하며 같으면서도 다른 선택이 그를 천주교인으로, 불교인으로, 무슬림으로, 프로테스탄틴으로, 무종교인으로 식별하게 하는 것이다.

<가톨릭신문>은 10면에서 ‘영국 가톨릭 신자 각료, 인간배아 법안 반대’란 외신을 전해주고 있다. 때때로 인용 보도되는 외신은 교회신문뿐만 아니라 신문을 보는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 (미디어 흘겨보기 2월 11일자 '교회신문의 가능성을 외신에서 본다 ' 참조)

신앙의 이유로 정부각료가 정부입법안에 반대를 표한다면

<가톨릭신문>10면 기사는 “독실한 가톨릭신자인 데스 브라운 국방장관, 루스 켈리 교통장관, 폴 머피 웨일스장관 등이 가톨릭 생명윤리의 가르침에 따라 의회에 상정된 정부의 인간생식-배아법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다. 신자 각료들은 내각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한해서는 신앙적 소신을 저버릴 수 없다며 고든 브라운 총리에 반기를 들고 있는 상태다. 영국의 정부 각료들은 정부의 입법안에 대해서는 통상 찬성표를 던지며 지지해 왔다.” 물론 여기서도 고위공직자에게 신앙이 ‘독실’하다는 평가를 잊지 않고 있다. 어쨌든 ‘독실’ 이전에 ‘용감’한 영국각료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어느 나라나 정부각료가 정부입법안에 신앙을 이유로 반대를 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 필자로서는 알 수 없다. 혹시라도 교회신문이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번 기획보도를 하면 좋은 기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영국이야기를 조금 더 하자. ‘신사의 나라로 정평이 나 있는 영국은 적어도 생명윤리에 관한 한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분명하고 뚜렷하게 반생명적인 정책을 추진해왔다. 생명윤리 의식은 최악이며 세계 최초의 복제양을 생산한 로슬린 연구소, 다른 나라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난자 매매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허용하는 나라’(가톨릭신문 2007년 3월4일)였다고 당시 외신이 전해 준 바도 있다. 그랬기에 이번 가톨릭신자인 각료들이 작정한 듯이 정부법안에 반대를 하고 그들의 신앙적 소신을 밝힌 것은 놀랍고 반가운 일이다.


독실한 신자 정치인이라면 정략적 판단이 아닌 신앙적 소신을

이제 남 이야기 그만하고 우리를 뒤돌아보자. <가톨릭신문>은 2007년 12월 16일 1면에서 당시 대선후보들을 상대로 생명의식을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도하였다. 그리고 헤드라인에 ‘사형폐지 찬성 5: 유보 1’을 밝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천주교회의 지론인 사형폐지에 유일하게 유보입장을 밝힌 단 한 명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니다.’라고 하는 천주교인 각료들은 없다.

이번만의 경우는 아니다. 지난 정권을 뒤돌아보자. 이제는 여당이 된 정당의 원내대표가 말하는 ‘좌파적 정책’이나 ‘과잉입법’이 아닌 주교회의나 산하 소위원회, 개별교구가 교회 입장에서 밝힌 몇몇 문제들에 대하여 천주교인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들이 어떤 입장이었는가? 주교회의가 그토록 말해왔던 사형폐지와 줄기세포연구반대에 대하여, 제주교구가 호소하였던 해군기지에 대한 평화의 섬 수호에 대하여, 주교회의 환경소위원회가 밝혔던 새만금 방조제 중단에 대하여 정략적 판단이 아닌 신앙적 소신을 당당히 밝힌 적이 있었는가?

이제 새 정부 출범에 따라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대운하’에 대하여 찬반양론을 떠나 교회는 특별위원회 조직을 결정하였다. (3월 16일 가톨릭신문 1면, 평화신문 20면) 천주교인 고위공직자와 국회의원들의 신앙적 소신을 알고 싶다. 독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교회신문을 기대한다. 두 주 연속 마무리는 같은 말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신앙인’이라고 불러도 늦지 않다.”

/김유철 2008-03-18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