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7월 6일자 977호 <평화신문>과 2606호 <가톨릭신문>이다.



‣ ‘교구’의 일인가, ‘한국천주교회’의 일인가?

<평화신문> 5면에 박스기사로 ‘제30회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제’가 천진암성지에서 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아울러 미사를 통해 초기 신앙 선조들의 시복시성을 기원했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다. 현재 여러 교구가 각 지역의 신앙 선조 중 의미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시복시성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천주교회는 특별히 7월에 한국성직자들의 수호자이며 첫 사제였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과 9월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을 경축하며 그들의 고귀한 순교와 한국천주교회의 박해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의 여명기는 아직도 온전히 기억되지 않고 있다. 가톨릭에 관심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한국천주교회의 특징은?”이라고 물으면 “평신도 스스로”라는 대답이 어렵지 않게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진암에 모셔져 있는 창립선조 5위인 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등에 대한 자리매김은 여전히 전문 학술서와 변기영 몬시뇰을 비롯한 소수의 관심자에 국한되어 있다.

현재 한국천주교회가 사용하는 예비신자, 견진교리, 청년교리서에는 창립기 역사를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가?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교회의 창설과정’을 현대의 한국천주교인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여부는 교회신문의 감시기능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론으로서의 순교와 생활로서의 순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이다. 마찬가지로 외형의 경축과 기쁨으로 맞이하는 경축은 더더욱 큰 차이일 것이다.

일부 신앙선조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이 아니라 ‘한국천주교회 창립기념제’가 수원교구의 일인가? 아니면 한국천주교회의 일인가?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혹시 한국천주교회 창립기와 인물에 대한 기념에도 주교들 간의 이견과 각 교구들의 견제가 있는가?

2008.7.6.가톨릭신문 1면

‣ 아! 교우였군요.

<가톨릭신문> 1면에 ‘안공근’이란 낯선(?) 인물이 소개되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6월 30일 “광복회와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촉성회를 결성하고, 김구 선생과 함께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제 요인 및 친일파를 암살하고, 한인군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1920~1930년대 무장투쟁에 앞장선 안공근 선생의 공훈을 기리고자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라고 발표한 바 있다.

<가톨릭신문>은 그의 세례명은 요한이며 “안중근(토마스)의 친동생이고 1898년 부활시기에 빌렘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 안정근, 안공근 삼형제와 사촌형제 안명근 모두에게 빚이 있다. 그것도 큰 빚이...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처단하였을 때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안중근의 독립운동행위를 비난하고 철저히 외면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천주교회를 이끌던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고 심지어 파문한 일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더욱이 “안명근이 민족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음을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알렸고, 뮈텔은 빌렘의 요구대로 그 사실을 눈이 심하게 오는데도 불구하고 일본헌병대를 찾아가 고발하였다.(MUTEL주교일기 1911.1.11) 이튿날 헌병대에서 뮈텔에게 감사가 전해졌고, 다음 날 총독부에서는 감사표시와 함께 밀고한 내용의 사실 여부를 빌렘에게 물어 볼 수 있느냐고 뮈텔에게 문의하였다.(MUTEL주교일기 1911.1.12) (참조: 한국근대사와 종교. 윤선자. 국학자료원. 2002년. pp.240)

세월이 지났다고 슬그머니 ‘아! 교우였군요’ 혹은 ‘우리 신자 독립운동가’란 허명에 함께 하지 말고 먼저 슬퍼하자. 그것이 한국천주교회가 할 일이다! 당연히 그것을 언론이 지적해야 하는 것은 덧붙일 필요조차 없다.

확인이 필요하다.

<가톨릭신문>은 안공근의 세례명이 요한이라고 했지만, 최석우 신부의 논문에는 안공근의 세례명을 ‘시릴로’였다고 밝혔다.(일제하 한국천주교회의 독립운동. 교회사 연구 제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1996년. pp.50) 정확한 기록을 위해 관계자의 확인을 바란다. 
 

/김유철 2008-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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