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5월 11일자 ‘친일 명단’에 대한 교회와 교회신문의 반응에 대한 두 번째 비평이며 5월 18일자도 참조하였다.


경성교구장 ‘오카모토’ 신부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의 성(姓)을 일본식으로 바꾸게 했다는 ‘창시개명’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슬프고도 아픈 과거를 똑바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지만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이 창피해서야 어디 살아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일본인에게 그 시대의 과오를 거듭 요구한다고 짜증내는 것은 일본인이 아니라 이제는 “후벼 파지 말라”는 우리의 지도자들이며 우리의 언론인 것이다.

<가톨릭신문>은 공교롭게도 5월 18일자 20면「한국교회사 80장면」에 지난 주 여기서 말한 2000년 당시의 ‘쇄신과 화해’를 실었다. “과거 잘못 고백하며 하느님 자비 청해”라는 제목이나, ‘정의 사회를 위한 노력’이라는 부제에 입맛이 쓰다. 교회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는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지치지 말자. 때가 오면 그 때마다 참회하고 용서를 빌자.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있다.

“피치 못해 친일했다”는 말이나 “그때의 심정은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고 자서전에 쓰지 말자. ‘피치 못할 사정’과 ‘깨물지 못한 혀’ 때문에 만세시위에 나섰던 사람들, 학살당한 사람들, 풍찬노숙 했던 독립군과 의병들, 체포되고 투옥된 사람들, 고문당하고 사라져간 사람들, 강제징용과 징병된 사람들, 관동대지진 때 피살된 사람들, 성 노리개로 끌려간 수만의 누이들...... 아, 그만하자. 그 사람들의 숫자가 아니라 회상만으로도 숨 가쁘고 가슴이 무너진다. 그런 일들이 당시의 교회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고 “민족에게 어떤 해를 끼쳤는지” 증거를 요구하는 교구 대변인과 그것을 착실히 받아쓰는 교회신문에게는 할 말이 없다. 아니 할 말이 있다. 1942년 당시 조선인 ‘오카모토’ 경성교구장의 담화문 전문이다. 꼼꼼히 읽어보라. 절대 흥분은 금물이다.

『국민총력-사변 5주년을 맞이하여』<경향잡지> 1942년 7월 15일자

지나사변이 시작 된지도 어언간 5주년이나 되었다. 노교구 사건이 돌발하였을 때 황군 측에서는 극력 불확대방침을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뜻대로 아니 되어 결국 일지 전면적 충돌로 확대되어 해를 거듭하여 오다가 드디어 작년 12월에는 대동아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때까지 세상은 황국일본의 진의를 몰라주었고 제국의 경제적 군사적 위력을 몰라보았다.

이에 때는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온 세상은 황국의 진의를 인식해야만 되고 황국의 위력 앞에는 놀랜 가슴으로라도 모든 적성국가는 굴복하게만 되었다. 과연 일지사변 이래 북지, 중지, 남지 등 그 광대한 전역에서 4주년이 넘도록 그만큼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나서도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자 불과 반년에 비율빈, 말래반도, 비르마니아지에서 적군의 그림자까지 없애는 동시 태평양 인도양을 제압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인류의 전쟁역사에 볼 수 없는 위대한 사실이다.

이는 위로 천황폐하의 어능위 하에 황군 장병들의 끓는 충성과 총후국민의 일심협력함의 당연한 결과로써 우리는 사변 5주년을 당하여 실로 감사함을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나 큰일은 이것으로서 끝난 것은 아니니 우리는 지나간 결과만 보고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할 일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기고 나서도 투구 끈을 졸라매라’는 예전 격언은 지금 모든 총후국민들의 가슴 속에 삭여들 바이니 이미 시작된 큰일의 성패는 과거에 보다도 장래에 있음을 생각하여, 비록 제국의 불패태세가 확립되었을지라도 이로 만족하여 방심하지 말고 오로지 성전 목적 달성에 정신과 힘을 통째로 바칠 것이다. 이를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당국에서 지도하는 바에 무언 복종할 것이오, 복종할 지라도 마지못하여 하거나 겉으로 하는 체만 하거나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여 나갈지니 특히 이 점에 있어서 모든 교우들은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942년 7월 7일 경성교구 오카모토 교구장
(오카모토는 노기남 교구장의 창씨명)

그 때의 자랑이 지금도 자랑일 수는 없다.

조선인 ‘오카모토’ 경성교구장 신부는 같은 해에 주교로 승품된다. 설마 일본에 의한 추천은 없었겠지만 그의 국가관이나 시국관을 미루어 참작한다면 주교성성을 일본이 반대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는 것은 오해일까? 한민족 최초의 주교였다고 자랑하기보다 이젠 슬퍼하자. 하긴 일본육군사관학교 3등 졸업한 ‘다카키 마사오’는 10여년 후 이 나라 대통령이 되었으니 막상막하인가? 축하한다! 다음 주도 계속된다.


/김유철 200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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