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6월 15일자 2603호 <가톨릭신문>과 974호 <평화신문>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6월 22일)을 맞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는 17일부터 25일까지 ‘갈라진 겨레의 화해와 일치’를 지향으로 기도운동을 전개한다. 마침 교회신문들은 6월 8일자에 ‘북한주민 아사를 막기 위한 긴급지원을 촉구하는 종교 사회지도자 기자회견’을 보도한 바 있다.

<가톨릭신문>은 6월 8일 20면 ‘북한 주민 위한 식량 긴급 지원 촉구’, 4면 사설 ‘인도적인 대북식량 지원 절실하다’, <평화신문>은 3면 ‘북녘 형제들에게 식량을’, 2면 사설 ‘기아사태에 직면한 북녘 형제들’을 실었으며, 8면 특집으로 ‘북 식량난 어디까지 왔나(상)’와 한국카리타스 ‘대북지원 전문가 초청 간담회’를 실었다.

6월 15일자에서 <가톨릭신문>은 18면 ‘우리 교구는 지금’기획 면을 이용하여 인천교구 민화위 ‘새터민 지원센터’를 소개했고, <평화신문>은 1면 ‘17일부터 화해와 일치 9일기도’, 8면 ‘북 식량난 어디까지 왔나(하)’를 실었다.
 


▶ 한국천주교회와 교회신문의‘인도적 지원’관심은 고맙고 당연한 일이다.

90년대 중반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와 북녘 땅의 연이은 큰물(홍수)을 비롯한 자연재해로 북녘주민이 겪은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행군’비극은 이후 외부세계에 북녘이 문을 열은 계기도 되었다. 또한 ‘새터민’이라고 부르는 탈북의 단초가 되었던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천주교회가 북녘에 대한 전향적 지원을 시작한 기점 역시 1995년의 일이기도 하다.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카리타스와 주교회의 민화위와 각 교구 및 수도회,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교회 외곽단체를 통한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고 있다. 또한 2008년 정권 교체이후 ‘인도적 지원’조차 머뭇거리는 정부에 앞서 북녘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종교계와 교회신문의 관심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때로는 대북 식량지원과 경협을 ‘퍼주기’에 빗대어 군량미나 군자금이 된다는 말이나 “끝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은 오히려 폭정을 부추기는 반민족행위”라는 섬뜩한 표현을 교회신문의 칼럼에서 보는 것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 (2007년 9월2일자 <가톨릭신문> ‘방주의 창’) 하나 덧붙이면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지 사랑에도 끝이 있는가?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이다.

▶ ‘북’에서 사라진 ‘미사’

평양에는 북녘 땅 유일의 천주교 성당이 있다. 1988년 10월 20일 현재의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가 교황사절로 평양을 방문하여 봉헌식을 주례한 곳이 평양 선교구역에 있는 ‘장충성당’이다. 이후 많은 성직자가 방문하여 그곳 신자들과 미사를 봉헌하고 형제적 사랑을 나눈 바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곳에서 ‘미사’라는 천주교 최고의 전례행위가 사라졌다. 교회신문에서 ‘장충성당’을 검색하면 <가톨릭신문>에서는 2001년 8월 19일에 당시 주교회의 사무총장 김종수신부가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하였다가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했다고 하였다. <평화신문>에서는 2005년 6월 15일 김종수신부 외 5명의 성직자가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에 참석했다가 “우리 신부들과 교우들이 장충성당을 찾아 그곳 '신자들'과 미사를 드렸다.”고 했다. 이상한 것은 앞의 기사에서 나온 ‘신자들’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작은따옴표 표기는 참관기를 작성한 당시 주교회의 사무총장 신부의 표현인지, 신문사의 작업인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이후 북녘의‘진짜 신자’는 계속 문제가 된다. 그리고는 평양 장충성당에서 공식적인 ‘미사’라는 단어는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들리지 않는다.

교회신문이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2006년 4월 26일 서울대교구 민화위 후원회원들과 함께 방북한 최창화 몬시뇰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장충성당을 방문하고 조선카톨릭교협회 신자들과 ‘말씀 전례’를 가졌다. (평화신문 2006년 5월 7일자) 고위 성직자를 비롯해 평양이 모원이었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수도자들, 북녘 땅이 고향인 신자들이 꿈에도 그리던 그곳 신자들과 함께 성당에서 만나 ‘미사’가 아닌 ‘말씀 전례’라니? 보도 잘못이 아니라면 무슨 까닭인가? 인도적 지원만큼 중요한 것은 교회의 신뢰회복이다.
▶ ‘진짜 신자’론은 해결해야 될 문제다.

2007년 5월초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와 함께 방북한 배영호 주교회의 사무총장 신부 등 남측 대표단은 평양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기쁨과 희망> 창간 준비호, PP.115. 2008년.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원인은 북녘의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결국 ‘진짜 신자’론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확대 진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애초부터 한국천주교회 상층부에서 가지고 있었던 해묵은 관점이기도 하다. 대북지원 초창기에 해당되는 1998년 5월 서울교구장을 대신하여 평양을 방문하였던 당시 최창무 주교(현 광주교구장)는 주교회의 방북보고를 ‘진짜 신자’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다.(주교회의 회보 1998년 7월 1일 PP.105-3. 제3차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 회의 1항 참조) 불행하게도 그는 당시 서울교구 민화위 담당 주교였다.

2006년 4월 서울교구 평협이 주최한 선교포럼에서 주제 발표한 유호열 교수는 ‘북한 신자가 진짜 신자냐는 논란과 관련, "오랜 종교 단절기를 거친 북한에서 신자들이 오늘날 남한 신자들과 같은 신앙을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무리"라며 "비록 거칠고 소박하나마 분명 북한 신자들에게도 신앙의 불씨가 있을 것으로 본다"는 포용적 입장을 밝혔다. 또 "장충성당 건립 당시 1100여명에 불과했던 신자가 현재 4000여명으로 늘어난 것 또한 긍정적 현상"이라면서 "그들을 향후 북한 선교의 씨앗으로 삼아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라고 <평화신문>은 2006년 7월 16일자에서 전한 바 있다.

식량지원과 함께 교회가 고민해야 할 점은 장충성당에 ‘동원’(위의 주교회의 회보 표현)된 사람들 안에 숨어든 하느님을 ‘진짜 신자냐?’라는 의심에서 해방될 때 민족화해는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신문이 ‘언론으로서’ 물어보자. “장충성당에서 미사하실 건가요? 사랑이신 주님의 몸인 성체를 나누실 건가요?”성직자와 평신도중 누가 호교론자인지 구분이 안 된다.

아주 오랜만에 드리는 보너스!

<평화신문> 6월 15일자 8면 ‘북 식량난 어디까지 왔나’기획기사의 마무리에서 민화위 위원장 김운회 주교는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1995년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며 그들의 아픈 삶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우리는 놀랐습니다. 수백만 형제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는데도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아파했을까 생각하면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이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화해와 평화의 시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성을 가지고 사랑을 베푼다면 북녘 동포들도 무서운 무기를 놓고 사랑과 평화, 협력과 번영의 세상으로 나올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축복하셔서 다시금 쌓아가는 신뢰의 끈이 더욱 튼튼해지기를 기도합시다."

그런데 이 말은 2007년 11월 개최된 ‘민족화해 가톨릭 네트워크’ 자료집 3쪽에 민화위 총무 한정관 신부의 격려사 내용 중 일부로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다. 신부의 말을 주교가 재활용 한 것인가? 혹은 편집자가 오려붙이면서 발언자의 격을 의도적으로 높인 것일까?

인용은 확실히 해야 된다. 공부하세요!

/김유철 200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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