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6월 8일자 973호 <평화신문>과 2602호 <가톨릭신문>이다.

 교회의 ‘친일문제’를 끝내고(?) 5주 만에 평상으로 돌아오니 나라 안이 쑥대밭이다. 아니 쑥대밭이 아니라 인공운하에 둥둥 뜬 미국산 쇠고기 밭이다. 이에 대한 교회언론의 관심 역시 적지 않다. 문제는 관심의 질이다.

청소년들이 시작한 ‘촛불’과 마이크 앞에서 끝내 울어버리는 소녀들의 말이 ‘시대의 징표’이자 ‘언론’이 새겨야 하는 길이다. 그런 세상의 소리를 바탕으로 함께 하는 것을 ‘사목’이라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말했다. “(세상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라고「사목헌장」이 말한 지 40년이 지나가고 있다.
 

평화신문 973호 1면

▶ 4월 18일 협상 타결과 103일 생명의 강 순례

4월 18일 한미정상회담 하루 전날 쇠고기 수입협상이 타결되었다. 그런가 하면 5월 24일 이른바 ‘한반도 대운하’에 맞선 4개 종단 종교인들이 103일 순례를 마감했다. 두 가지 시국문제와 관련된 교회신문의 보도를 추려보자.(5월 4일자 이후)


<평화신문>은 5월 11일 11면 전면 ‘쇠고기 무한 개방시대, 국내 사육농가 희망은 없나’
5월 24일 21면 4단 ‘대운하 백지화 천주교연대’출범
6월 1일 11면 전면 ‘생명의 강 순례단 서울 도착하던 날’
6월 8일 1면 서울대교구 정평위, 광주 정평위, 전주 정의구현사제단 성명
17면 서울 정평위 성명서 전문
8면 3단 대운하 설명회를 실었다.

<가톨릭신문>은 5월 18일 사설 ‘광우병,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경고’
5월 25일 23면 2단 ‘대운하백지화 천주교 연대 출범’
6월 1일 1면 2단 주교회의 정평위원장 최기산 주교 담화중 대운하 관련
22면 3단 대운하 설명회 기사이다.

재미있는 것은 <가톨릭신문>에선 자체 출고기사가 아닌 외부 필진이 오히려 더 직설적이다. 6월 1일 5면 외부칼럼 ‘강을 흐르게 하라’, 5월 25일과 6월 8일 ‘사목체험기’의 ‘촛불문화제’ 내용이다.

신문사의 취향은 결국 기사로 드러난다. 취향에 대해 구별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기사보다 외부필진이 세상소리 듣는 것에 예민하다면 좀 멋쩍어진다. 더욱 두 신문 모두 사회와 독자를 한발 앞서 이끌어가는 예언자적인 모습은 아직도 모자란 듯하다. 독자들보다 발걸음이 늦다면 이미 신문(新聞)보다 구문(舊聞)이다.


▶ 무속은 학자 연구용이다?

<가톨릭신문>의‘커버스토리’는 5월 4일‘한국교회 가난한가?’에 이어 두 번째다. 이번 주제는‘신앙을 점(占)치는 사람들’이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어 좋다. 그런데 제목이 영 까칠까칠하다. 의미는 이해되지만 제목을 거듭해서 읽어도 문구가 이해되질 않는다. ‘신앙을 점치는 사람들’ 무슨 말인가요?

아무튼 기사는 1면 여는 말과 7면 점술 밀집지역 르포에 이어 8면 ‘교회의 사목적 대응’으로 이어진다. 결국 기사는 문제의 해법으로 점을 보는 행위가 교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명백하게 신앙에 위배된다는 점과 점술에 의지하는 신자들의 정신을 위로하는 사목적 배려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르포의 마무리에 점술가에게 다녀온 뒤 ‘그의 모습은 진지하기보다 차라리 유쾌했다.’라고 말하였지만 주제에 너무 진지하게 접근한 것 같다. 유쾌한 점술가와 기사 제목 ‘점보고 고해성사... 그들의 이중생활’은 아무래도 이율배반적이다.

더욱이 ‘커버스토리’와 별개로 같은 날짜 15면에 실린 ‘한국그리스도사상 제15집’ 책 소개는 역설적이다. 책의 주제는 ‘그리스도교, 무교와의 대화’이다. 무속은 그리스도인에게는 ‘학자들의 연구대상’일 뿐 일반신자는 결코 접근하지 말라? ‘커버스토리’가 취재 영역을 좀 더 넓게 고민해야 하는 대목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 표지삽화에 나온 석가모니불은 이웃종교의 공경대상이지 기복신앙이나 점의 대상이 아니다. 혹, 불교신문의 기복신앙 특집기사에 십자가가 나온다면 억울하지 않겠나?

/김유철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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