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지난 5월 11일자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을 다시 본다.

한국천주교회의 ‘원죄’가 되어간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에 대한 교회신문의 반응을 네 번째로 비평한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네 번씩 연재를 하는 것은 교회신문이 보인 보도관점이 참으로 어이없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의 친일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교회와 교회언론이 회피하면 할수록 이 문제는 한국천주교회의 원죄가 될 수밖에 없다. ‘원죄’는 하늘이 주는 것이 아니라 늘 ‘자신’이 만드는 것이다. 한국교회 역사는 이제 겨우 2백20여년이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국천주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해 어물쩍 넘어간다면 앞으로 1천년이 지나도, 2천년이 지나도 이 문제는 교회역사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천주교 관련인사 7명의 혐의가 억울하다면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밝힌 내용에 대하여 당당히 맞서라. 그러나 그 ‘맞섬’이 오히려 친일의 허물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모래 탑을 공적인양 내어놓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번 친일문제 마무리로 세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어떻게 참회할 것인가?

고해성사 중 고백하는 법을 교회는 기억하는가? 아니 그렇게 물어보는 것은 결례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전공과목이다. 자신(남이 아닌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하여 ‘솔직하게’, ‘겸손하게’, ‘똑똑한 발음으로’, ‘무슨 죄인지 명확히’ 해야 한다. 혹시라도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도...”라고 기타 등등에 본론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시키는 것은 천주교인의 도리가 아니다. 그 당시 왜 그렇게 했는지는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말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할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2000년 대림에 발표한 <쇄신과 화해>에서 일제시대의 잘못을 70여 글자로 마지못해 압축한 반면, 가해자 일본의 천주교회는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1999년 <일본 가톨릭 중앙협의회> 산하의 ‘복음선교 연구실’이 「전시(戰時), 일본 가톨릭교 교회의 입장과 신사참배」란 책을 통해 청일전쟁(1882년)부터 항복(1945)까지 일본 가톨릭교의 부끄러운 발표문을 옮겨놓았다. 더욱이 이 책 추천의 말씀은 동경대교구 시라야나기 세이이치 추기경이 썼으며 “이 책을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돌아가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여러분들께 바칩니다.”로 시작한다. 놀라운 것은 이 책이 교회사연구소 혹은 학자에 의해 출판된 것이 아니라 <일본가톨릭중앙협의회> 즉, 우리나라의 경우 <CCK>가 발행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가톨릭출판사에서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란 제목으로 2000년 번역 출판되었다. 참조하시라. 그리고 교회어른들과 교회언론은 본받길 요청한다. 그것은 최소한의 고백이니.

둘째, 개인의 공적과 과오를 어떻게 볼 것인가?

수학에서는 5를 더한 후 5를 빼면 원래의 상태가 되겠지만 역사 안에서의 잘못은 그렇게 치유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사람 눈에 피눈물 나게 한 후, 물에 빠진 두 사람 구해줬다고 그 사람의 죄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보되 그 일의 선후를 지혜롭게 살펴봄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부끄러운 과오를 교회 안 사람들만 아는 공적으로 가리려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더욱이 그런 일을 교회신문이 하는 것은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게 할 뿐이다.

혹시라도 친일문제 청산의 작업들이 어느 개인을 폄하하거나 심지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부관참시라고 여기지 말라. 이런 청산작업을 통한 <참회와 화해>가 아니라면 우리는 역사를 통해 그 명단에 또 다른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보는 비극은 되풀이 될 것이다. 역사는 ‘그때-거기’의 문제가 아니라 늘 ‘지금-여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혈맹국의 이름으로 지금도 다른 나라의 군대가 버젓이 서울 한복판에 주둔하고 있다. 20세기의 ‘내선일체’는 21세기의 ‘혈맹’과 다른 것일까?

50년 후 ‘반민족 인명사전’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미리 ‘나’의 이름을 찾아라.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니. 7명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다.

셋째, “교회는 왜 실록을 편찬하지 않는가?”라고 언론은 외쳐라.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이 발표되던 날 한 기자가 물었다. “오늘 발표한 4800여 명의 친일인사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이제 면죄되는 겁니까?” 그 질문을 전해 들으면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천주교는 7명으로 민족 앞에 이제 면죄되는 것인가?”라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언론은, 그리고 기자는 그렇게 물어야 하고 문제제기 해야 하는 것이다. ‘언론(言論)’은 ‘도(道)의 다스림을 둘러 싼 논의’라는 ‘언치논도(言治論道)’라는 말의 줄임이다. 현대의 언론은 사간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신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교회의 ‘기관지’라는 스스로의 게토에서 벗어나, ‘기관지’이기에 해야 할 교회의 잘못된 정책과 언행들에 대해 직언을 해야 하는 것이 언론의 몫이다. 그래서 펜이 칼보다 강한 것이다.

조선시대 기자라 할 수 있는 사관이 작성한 기록의 정확성과 평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최고 권력자들은 무분별한 권력의 행사를 자제했다. 교회신문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지금여기’에 묻혀 있지 말고, 깨어 사는 ‘지금여기’에서 “교회는 왜 실록을 편찬하지 않는가?”라고 외쳐라. 아니 “이제는 숨겨놓은 문서를 공개하라.”고 외쳐라.

이제 마무리다. 언젠가 때가 오면 교회의 친일문제를 더 상세히 살펴볼 것을 약속한다.

/김유철 200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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