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4월 27일자 2596호 <가톨릭신문>과 967호 <평화신문>이다.

가톨릭신문 13면

▶ 노동자 ․ 근로자 ․ 직장인

노동절을 맞아 두 교회신문은 모두 관련 기사를 작성했다. <가톨릭신문>은 13면 ‘근로자의 날 탐방-서울대교구 직장사목부’를 실었고, <평화신문>은 10면 ‘근로자의 날-노동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실었다. 돌이켜 살펴보자. 과연 교회신문은 인간이 행하는 ‘노동’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교회신문은 ‘노동’과 ‘근로’와 ‘직장’을 같은 무게의 단어로 받아들이는가? 법률가 이상으로 단어의 가치에 매달리는 것이 언론일진대 어찌 개념이 다른 용어가 이토록 남발되고 혼용되는가? 무슨 이유로?

1891년, 가톨릭교회는 중대한 사회문제에 대한 최초의 응답을 했다. 레오 13세의 사회문제에 대한 첫 회칙 「새로운 사태」가 반포된 것이다. 노동절은 그보다 1년 전, 노동자들이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제 확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시작되었다. 이 날은 국가 혹은 기득권이 <평화신문> 10면의 인용대로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 의욕을 높이고자 제정된 날’이 아니다. 그 날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의 희생이 이어졌는지는 ‘헤이마켓’ 사건(1886년 5월 4일)등이 말해주고 있다. (‘헤이마켓’ 사건미국 시카고에서 경찰과 그에 항의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벌어진 폭력적인 충돌사건(1886. 5. 4).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사태」이후에도 계속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응답으로 비오 11세의「40주년」, 바오로 6세의「80주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노동하는 인간」「사회적 관심」「백주년」을 반포한 바 있다. 현재의 교회신문은 과연 그간 교회의 노력만큼이나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것인가? <가톨릭신문>이 특집임을 밝힌 ‘직장사목부’ 탐방기사가 적절한 특집이었다고 자위하는가? ‘노동’이란 단어를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근로자의 날’을 보도한 <가톨릭신문>은 교황들의 회칙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교회신문인가?

낭만적인 대학축제를 즐기는 대학생이 ‘5월 대동제’의 의미를 모르듯, <가톨릭신문>의 기사 역시 5월 1일이 왜 노동절인지 모르고 그저 하루 쉬고 마는 직장인들의 모습과 다름없다. 직장인들은 기왕이면 회사 창립기념일에 쉬고 노동절은 노동자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실용적(?)이다. <평화신문>은 글머리에 ‘근로자’란 용어를 세 번 사용하다 아무래도 갑갑했는지 이후 ‘노동자’라 표기하며 ‘노동’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런데 그 모양이 어째 이상야릇하다. 10면의 첫째단락 ‘노동의 의미와 가치’, 둘째단락 ‘노동자의 권리’까지는 한 호흡인데, 셋째단락 ‘노동조합과 파업’은 일종의 경고로 보인다. “다 좋은데 이건 안 된다.”는 마지노선 같다. 교회신문의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어엿한 노동조합이 있는 언론사의 공식보도인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것이다. <평화신문>은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다. 그런 회사의 보도에서, 제한규정을 두긴 했지만 스스로 ‘파업권’을 옹졸하게 해석한 대목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새삼스럽진 않다.

1945년 식민의 땅에도 해방의 기쁨이 오고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되어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다. 그 후 1948년 ‘대한노동총연맹(대한노총)’이 결성되고, 1957년에 5월 1일이 북한의 기념일과 겹친다는 이유로 대한노총의 창립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채택했다. 그러나 박정희시대의 개막과 함께 ‘노동’이란 용어는 불온한 용어로 취급되면서 1963년에 ‘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개명했다. ‘기념일’이 ‘단체생일’로 바뀐 것이다. 원래의 의미는 각색되어 ‘노동절’의 이름도, 날짜도 모두 사라진 기이한 날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난 1994년이 되어서야 정부는 그 날을 한 단체의 창립일이 아니라 원래의 기념일인 5월 1일로 개정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이름은 ‘근로자의 날’이다. 누가 ‘노동절’을 두려워하는가? 요한바오로 2세 교황이 반포한 「노동하는 인간」의 대상자는 근로자인가? 직장인인가? 노동자인가? 두 신문사의 「노동하는 인간」에게 ‘메이데이’의 힘을 전한다.
 

/김유철 200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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