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6월 22일자 975호 <평화신문>과 2604호 <가톨릭신문>이다.

‣ ‘당신 뜻대로 내게 이뤄지소서’

또 ‘이 분’인가? 를 몇 번이나 웅얼거리다 글을 쓴다. 지난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과 관련하여 천주교회에서는 보기 드문 순발력으로 나온 4월 30일자 서울대교구 대변인의 「가톨릭인사 ‘친일명단’ 발표에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서와 이를 보도한 5월 11일자 교회신문들의 보도에 대하여 네 번에 걸쳐 미디어비평을 한 바 있다. 그리고 일단락을 했다.

그런데 서울교구로서는 예정된 행사였겠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 제기한 일제강점기 친일인사들의 논란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대상자의 한 명인 ‘노기남’ 전 서울교구장의 이름을 붙인 건물이 사당동에 들어섰다. <평화신문>은 20면 2단기사로 사진을 곁들여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교원 기숙사 '노기남관' 축복식」을, <가톨릭신문>은 3면 1단기사로 「노기남관 축복, 서울대교구」가 실렸다. 기사내용을 보면 이번 행사는 정진석 서울교구장의 주례로 진행되었으며 건물의 용도는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의 교원 기숙사(사제관)인 모양이다. 건물 이름에 전 교구장의 이름을 붙인 의미를 <평화신문>은 “노기남관은 첫 한국인 주교로 일제강점기에 한국교회를 지켰고, 경향신문 창간 등 교회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고 노기남(바오로, 1902~1984, 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명명됐다.”라고 했으며, <가톨릭신문>은 “노기남관은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인 첫 주교인 노기남 주교의 영성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고 했다.

이해할 수 없다. 사회적 비난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인물의 이름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제들의 생활공간에 붙인다는 자체가 교육적이지도 신앙적이지도 않다. 이미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다른 것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재고해야 할 것이다. 신문이 말하는 그의 영성이 그의 모토였던 ‘당신 뜻대로 내게 이뤄지소서’였다면 후학들 역시 ‘당신의 뜻’이 ‘올바로’ 해석될 수 있도록, 그리고 ‘두렵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함이 마땅하다.

‣ 건물에 이름 붙이는 것은 그 분을 기리는 일이 아니다.

그가 은퇴하였을 때 당시 유일한 교회신문의 사설은 다시 읽는 것조차 민망하다. 인용한다.

「노대주교 은퇴의 계기와 우리의 반성」

노기남 대주교께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직을 사임, 성직 38년 감회 깊은 명동주교좌 성당을 떠나 평소 마음의 고향으로 그리시던 ‘나자렛’ 본향으로 은퇴하셨다는 사실은 독자들도 이미 주지의 일이거니와 교구장의 사임 은퇴등은 이번이 한국교회사상 결코 처음의 것도 아니며 새롭고 신기한 소식도 아니다. 그러나 금반의 경우처럼 많은 잡음과 낭설과 속단들이 꼬리를 물고 유포된 일도 없은 것으로 안다. 도하(都下) 각지(各紙)는 물론 지방지 까지도 이 잡음 낭설들을 일제히 기사화하고 있으니 과거에는 이런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잡음’ 또는 ‘낭설’을 추려보면 ‘K신문 이양’사건 ‘군표’사건 ‘종교불(宗敎弗)’사건 ‘부도수표’사건 은혜를 받은 ‘여인들의 작당’ ‘금전갈취’사건 등등이다. 어느 하나를 막론하고 다 불행한 일이요 부끄러운 일들이다. 그러나 잡음은 잡음이요, 낭설은 낭설로 그치는 법이다. 여기서 그 진상을 밝히거나 해명을 운위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다.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란은 이번 사례를 두고 내일의 교회를 위하여 성직자나 교우들이나 다 같이 몇 가지 반성을 해야 할 점을 지적해 둘 뿐이다.

이러한 이른바 ‘잡음’ 또는 ‘낭설’들의 출처내지 조작이 사실은 여하 간에 가장 교회를 사랑하고 아끼며 사목의 길을 보필해야 할 성직자와 교우들 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세속의 보도기관들은 대체로 이 기사취급에 있어 오히려 심성 있는 태도와 이해와 동정적이었음에 비하여 교회 내에서는 일절 내용보도에 묵비로 일관했다는 점은 우선 이해가 간다고 치더라도 구전에서 구전으로 그 전파가 비판에서 일말의 형제애도 찾아볼 수 없는 잔인박행의 심정이 아니었던가? 정복(征服)의 사도직을 지금도 고집하고 있지나 않은가. 성직자의 과오라 할지라도 결코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곧 교회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특히 서울대교구 각 위 성직자들은 성직자 본연의 마음과 몸가짐으로 돌아가 사제공동체 의식과 동기간적 합심단결로 이 난관을 극복해 줄 것을 희구하는 바이다. 이 ‘잡음’의 대부분은 금전, 특히 외환에 관한 건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기회에 성직자들의 세속적 사업기관에 대하여 재고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하략)

(<가톨릭시보>67년 4월 16일 564호 2면 사설)

또한 그 이후에 발간된 서울교구의 공식사료에는 그의 은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노기남 주교는 1967년에 이르러 일신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은퇴하였다.
(서울대교구 교구총람. 1984. 가톨릭출판사 pp.114)

한국천주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힘써온 노기남 대주교는……1967년 3월 27일 한국교회의 장래를 후진에게 맡긴다는 생각에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고….
(명동본당사-Ⅱ. 2007.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성당. 한국교회사연구소 pp.198)


그의 은퇴 후 17년 만에 나온 사료와 40년 만에 나온 사료는 그의 은퇴를 달리 해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이번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의 등장이다. 어쩌면 동시대인이 사라진 100년 후에는 그의 ‘기념관’이 들어섬직 하지 않은가? 교회의 어른이요, 어려운 시절에 쉽지 않은 소임을 수행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불행하게도 많은 논란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번처럼 건물에 이름을 붙이는 식으로 하는 것이 그 분을 기리는 일은 아닐 것이다. 교회신문들은 결코 이를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 주로 인물들의 추모 수순은 특정 건물 명명, 동상-흉상제막, 기념관 건립, 기념행사가 일반적이다.

‣ 이름으로 세상을 누르는 존재들 그리고 따르는 사람들

서울교구에서는 아주 멀리 남쪽 변방의 작은 도시 ‘마산’이란 곳이 있다. 그곳에서는 한 지역신문사와 시민단체가 지난 1999년부터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형태는 보이지 않으나 이름으로 아직도 세상을 누르고 있는 존재들이 있다. 항일운동의 상징적 노래 중 하나인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 그리고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사설로 언론인의 사표가 된 ‘장지연’은 이 지역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지난 번 발표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에 포함된 인물들이다.

여기서 고단한 그동안의 일을 다 소개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궁금한 독자들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거간의 사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마산시가 추진했던 ‘조두남기념관’은 2000년 개관식 당일 관청의 일방적 추진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충돌까지 발생하여 3명이 구속되는 불상사를 낳았고, 지루한 법정다툼 끝에 2005년 ‘마산음악관’ 으로 이름을 달고 개관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은상기념관’도 ‘마산문학관’으로 이름을 달리했다. 또한 언론인의 사표였던 ‘장지연’의 친일행각을 밝혀내고 마산시 현동에 위치한 그의 묘소 앞 도로였던 ‘장지연로’의 명칭철회 및 도로표지판 철거운동을 벌여 2006년 5월 10일 도로명을 ‘장지연로’에서 ‘가포로’로 변경하였고, 도로표지판은 2008년 5월 31일 마산시가 철거하였다. 또한 ‘장지연묘’에 대한 경상남도 문화재(제94호) 지정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이 지역의 특이한 ‘보수성’을 아는 전국의 독자들은 이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짐작을 갈 것이다. 우스운 말로 “일제시대 독립운동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지역의 친일문제와 싸우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 귀를 열어라. 제발!

선임 교구장에 대한 공경심으로 그 이름을 딴 건물이나 ‘기념관’을 짓고 싶겠지만 그런 일들이 오히려 그 인물에 대한 아픈 과거를 더 드러내는 발단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 일에 변방도시 ‘마산’보다 못한 ‘서울大교구’의 모습에 실망이 크다. 더욱이 교회신문들은 그 인물이 동시대인에게 던져주는 ‘삶과 영성’을 알리고 싶다면 당당하게 밝혀라. 그것이 무엇인지 정말 듣고 싶다. 언론이 살아야 세상이 밝은 법이다. 언론의 힘은 교회권력이 아니라 독자와 하느님 백성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나저나 서울교구에는 시민단체도 없나?

/김유철 200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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