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지난 5월 11일자 <가톨릭신문>과 <평화신문>을 다시 본다.

가톨릭신문 4면 사설

경성교구장의 담화문이 ‘추상적이고, 소극적인’ 친일 행각인가?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지난 4월 29일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에 대한 교회신문의 반응을 세 번째로 비평한다.

지난 주 우리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1942년 발표된 조선인 ‘오카모토’ 경성교구장 담화문중 하나를 살펴보았다. 그런 류의 담화문과 교회의 공식 권고문은 수도 없이 많이 있다. 그 자료들을 다른 곳이 아닌 천주교회 공식 기관지인 당시 <경향잡지>에서 보는 것이 슬프디 슬픈 일이지만 어쩌랴.

<가톨릭신문>은 5월 11일자 2598호 4면 사설에서 “지난날의 역사를 바로 평가하자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친일 행각이 확인된 경우만 명단에 올려야 한다.”며 이의를 달고 있다. 지난 주 「미디어 흘겨보기」에 실린 ‘오카모토’ 교구장의 담화문이 당시 혹은 현재의 잣대로 보면 ‘추상적이고, 소극적인’ 친일 행위로 보이는가?

그것이 언론인의 시대감각이며 사설의 제목처럼 ‘단 한명의 억울함도 없어야 하는’ 우스꽝스러운 ‘잣대’인가? 그래서 그것이 모자라 <평화신문>은 7명의 ‘억울한’ 교회 공헌자를 위해 969호 8면에 그들의 과오가 아니라 공적을 늘어놓았는가? 더욱이 그 중 몇 사람은 일제에 의한 피해자로 나와 있으니 이쯤 되면 적반하장이며 역사에 대한 모독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도대체 교회신문은 역사를 무엇으로 보는가? 무엇을 역사라고 부르는가?


언론인과 종교인의 부역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해야 한다.

<평화신문>은 969호 8면 해설기사에서 “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동요 ‘고향의 봄’의 작사가 이원수, 고려대 총장을 지낸 현상윤 등이 친일파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고 말하고 있다.

‘뒤집어쓰다’니요? 누명 혹은 억울하다는 뜻이 포함된 뒤집어쓴 과오를 하나만 보자. 신문과 관련된 비평이니까 한때 언론인의 표상이었던 장지연을 보자. 한국기자협회는 매년 신문의 날(4월 7일)에 장지연의 묘소에 참배를 하였지만 그의 친일행적이 밝혀진 이후로는 참배를 중단했다. 우리나라 기자들이 누군데 한때 그들의 표상이었던 인물이 특정세력에 의해 친일파라는 죄를 ‘뒤집어썼다’고 참배를 그만두겠는가?

장지연이 쓴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황성신문> ‘시일야방성대곡’ 사설을 아무리 높게 평가 한다고 해도 1910년 11월 2일 <경남일보>에 일본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를 싣는 등 노골적인 친일 면모를 보였다. 이후 <경남일보> 주필로 재직하면서 일본 왕을 찬양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장기간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써왔다.(4월 30일 민언련 성명서 참조)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가 언론인이며 독립유공자로서 예우를 받는 만큼 더욱 엄격한 잣대가 필요한 대목이다. 교회신문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어엿한 언론인이며 기자들인데 그들은 아직도 장지연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며 언론인의 표상이라고 생각하는가?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침묵 그리고 망각

2차세계대전후 나치정권하에서 불과 4년을 보낸 프랑스가 비쉬정권과 부역자에 대하여 무려 백여만 명을 체포하고 4만 명 이상을 형사처벌한 것에 비추어보면 일제치하 36년의 세월동안 처벌이 아니라 친일인명사전 대상자가 불과 오천 명이 채 안 되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비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프랑스인들이 정계는 물론이지만 언론인과 문인을 엄격히 처벌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또한 유태인학살에 관한 비쉬정부의 후견세력이었던 당시 교회가 오랜 요청을 거부해오다 리용 대주교인 Albert Decourtray 추기경이 가톨릭의 부끄러운 과거를 담고 있는 비밀문서창고를 공개하였다. 침묵해서 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세월이 약’이길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망각을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죄업의 시작일 뿐이다.

시대와 상황논리에 따라 자기입장에서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도 그들 나름으로 할 말이 책 열권도 넘을 것이다. 개인을 단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고 기록하란 말이다. 그 이름 속에 언제나 ‘나’의 이름이 오를 수 있는 것이니. 교회 권력자가 말하면 받아쓰는 ‘기관지’가 교회신문의 목표가 아니라, 1927년과 1988년 교회신문의 입으로 말한 창간사를 오늘 다시 서늘한 마음으로 보시라. 다음 주 한 번 더!

/김유철 2008-05-27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