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4월 20일자 966호 <평화신문>과 2595호 <가톨릭신문>이다.

직접 취재에 의한 것이 아닌 인용이나 간접취재에 의한 기사는 솔직 담백해야 한다. 기사의 원천자료를 입맛에 맞게끔 ‘짜집기’하다 보면 의미전달이 달라질 수도 있다. 물론 기사분량을 맞추다보면 원천자료를 줄일 필요도 있고, 기사 제목도 달리 표현 할 수 있지만 원천자료에 감정이입 되어 그 농도가 ‘찐’해지면 독자는 의미도 모르면서 취할 수밖에 없다. 4월 20일 두 교회신문에는 이와 견줄 수 있는 기사들이 공교롭게도 하나씩 있다. <평화신문>은 7면에 ‘가톨릭 교육을 사수하라’는 외신을 인용했고, <가톨릭신문>은 1면에 ‘속 시원히 고해성사 좀 봤으면’ 이라는 해외 한인공동체 소식을 실었다. 문제를 하나씩 짚어보자. 

▶ 한 다리 건너온 외신은 가능하면 그대로 전하자.

<평화신문>이 인용한 외신은 미국주교회의가 제공하는 Catholic News Service(CNS)의 4월 14일자 News Briefs의 한 꼭지였으며 원래의 제목은 ‘Franciscan says Catholic schools in Holy Land must be supported’였다. 그러나 <평화신문>에서는 원래의 제목은 부제로 빠지고 원문에는 없는 전투적(?) 용어인 사수(死守)라는 말이 등장했다.

또한 기사의 내용은 한 신부가 영국에 본부를 둔 ‘성지 기독교인 가족들의 가난구제와 교육향상을 위한’ 자선단체 에서 연설하기 위해 런던에 머물렀던 기간인 4월 11일 런던에서 기자회견(press conference)을 하였는데 <평화신문>에서는 자선단체의 회의에서 발언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원문을 인용한다. 비교하여 보시라.

-He told an April 11 press conference in London that the main challenge for the Christians, who form 1 percent of the population of Israel and the Palestinian territories, was how to remain united. Father Pizzaballa was in London to address the Terra Sancta Education Trust, a U.K.-based charity for the advancement of education and relief of the poverty of Holy Land Christian families. (www.catholicnews.com 참조). 이어 그는 영국의 가톨릭인이 성지순례와 영국내 가톨릭학교와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영토의 학교를 자매결연 맺도록 하는 것 등의 주도적인 일을 통해 성지의 기독교인들을 지원해줄 것을 촉구했다.

영국에서 한 성직자가 기자회견한 내용을 미국주교회의 산하의 언론사가 보도하였고, 그것을 다시 국내 교회신문이 인용하는 동안 원래의 뜻이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기에 더욱 원문에 충실하고 담백한 인용이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교육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사수’까지는 아니다.


천주교 수원교구 인터넷신문-1

▶ ‘르포’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구별되어야 한다.

<가톨릭신문>의 1면 기사 ‘속 시원히 고해성사 좀 봤으면’ 이라는 해외 한인공동체 소식은 조금 복잡한 비평을 해야 된다. <가톨릭신문>은 이 기사를 ‘교구/종합’으로 배치하였다. 통상 <가톨릭신문>의 ‘기획/특집’란에 어울리는 기사가 성격을 조금 달리한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비평과는 달리 기사는 사실 간단하고 소박한 내용이다.

아프리카 최남단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는 한인 가톨릭공동체가 있으며 현재는 콩고출신 신부의 도움으로 미사를 드리고 있다. 그리고 자체 성전을 마련하기 위해 어렵게 기금을 모으고 있으며 무엇보다 한인 사목자가 오길 기대하며 지낸다는 내용이다. 덧붙여서 고해성사의 어려움을 전해주며 무엇보다 현지의 한인공동체가 목자 없었던 초대 교회와 닮았다고 전해준다. 기사를 읽으면서 그곳 교우들의 열의가 느껴졌고 어서 빨리 교민들이 원하는 환경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를 함께 기도했다.

그러나 <가톨릭신문> 보도 속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고해성사’ 방법에 관한 관점이다. 기사 안에 인용된 것을 보면 교민들은 부활이나 성탄을 앞두고 ‘공동고해성사’를 하며 한 교우는 “공동고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사의 제목은 “속 시원히 고해성사 좀 봤으면...”으로 바뀐 것이다. 바뀌다니? 제목을 단 것이 아니라 바뀌다니? 그것은 조금 후에 알게 된다.

고해성사는 제2의 세례라고 말할 정도로 중요한 성사이다. 세례가 그리스도 공동체로 사람을 편입시키는 것이라면 고해성사는 죄로써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자에게 그리스도 안의 생명을 회복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해성사는 참으로 중요한 천주교인의 전례행위이다. 그러나 먼저 ‘공동고해’라고 표현된 성사의 방법에 관해서는 신학자들안에서 거듭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 학자들 간의 논쟁을 재연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몇 가지 전제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공동고해’라는 용어는 교회의 금기 용어가 아닌 살아있는 용어이다. (참조문헌: 그리스도인의 가르침 p509~511 1989년 중판 바오로출판사 , 가톨릭신앙입문 p548~554 1983년 8판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학습교재 p235~236 2000년 가톨릭대학교 교리신학원, 가톨릭교회 교리서 요약편 p122 2007년 1판 천주교중앙협의회)

기사에서 교민들의 호소는 ‘고백’을 들어주고 ‘하느님의 용서’를 전할 사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언어소통이 되는 ‘한국인’ 사제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글의 원본을 소개하자.

이 기사는 4월 20일자 <가톨릭신문>에서 유모 기자와 서모 명예기자 명의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이미 4월 7일에 <천주교 수원교구 인터넷신문>(http://news.casuwon.or.kr) 열린마당의 신앙체험에 서모 명예기자가 <요하네스버그 공동체 주님수난성지주일 미사>란 제목으로 게재 되었다. 이어 그는 같은 날 2탄으로 <요하네스버그 성경모임>을 함께 올렸다. <가톨릭신문>의 1면 사진은 인터넷 2탄 기사에 들어있는 성경모임-가톨릭신문은 기도모임으로 소개했다.- 사진으로 역광이어서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으며, 제목이 “속 시원히 고해성사 좀 봤으면..”이기에 더욱 슬퍼 보인다.

그러나 인터넷 1탄에 나와 있던 사진 중 콩고출신 사제집전의 미사 사진이 들어갔다면 기사는 달라진다. 분명 신문기사는 인터넷의 1탄과 2탄 기사를 합해 놓았는데도 콩고사제와 한인공동체가 얼마나 지혜롭게 미사와 성사를 진행하고 있는지를 간과하고 있다.

서모 명예기자가 진솔하게 작성한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자. ‘......주님수난성지주일미사는 60여 명의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콩고 출신 에디 신부의 집전으로 경건히 진행되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주보로 모시고 있는 한인천주교회 공동체의 미사는 언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평신도 전례 봉사자가 중심이 된다. 사제에게 안수를 받은 평신도 전례봉사자가 신부를 대신해 복음을 낭독하고, 특히 강론은 한국인 신부가 쓴 주일 복음 강론을 책에서 발췌하거나 인터넷으로 얻은 강론 자료로 대신하고 있었다. 또 특별한 점은, 미사 중 ‘공동 고해 성사’였다. 외국인 사제와 속 시원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하게 된 이 공동 고해성사는 각자 성찰하고 미리 준비한 고해할 내용을 적은 종이를 미사 중에 바구니에 넣고, 그 다음 사제가 사죄경을 외우면 미사 후에 전례 봉사자가 사제가 정한 보속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놀랍다. 아마도 교민들에게 필요한 목자는 ‘개별고해’를 베풀어 줄 목자가 아니라 그들이 취한 ‘공동고해’의 방법이 놀라운 지혜라는 점을 알려주고 용기를 북돋아줄 목자이다. 많은 것을 한인공동체에 양보한 콩고사제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울러 한인공동체의 바램대로 상주 사목자가 부임하기 전이라도 많은 제약이 있겠지만 비행기로 두 시간 정도 떨어져 있다는 케이프타운에 있는 교포사목 신부의 부정기적인 격려방문은 불가능한 것일까?

이제 <가톨릭신문>에게 질의한다. 이 기사를 작성한 ‘명예기자’는 어디서 위촉한 명예기자인가? 이 기사의 출전은 <천주교 수원교구 인터넷신문>인가? 2007년 10월 28일 창간된 <가톨릭신문 수원교구판>을 계기로 두 곳은 ‘니것 내것’이 없는 것인가? 무단전제가 아니길 바라며 양해를 받았더라도 기사의 출처를 밝혀주는 것은 신문사의 도리이다. 아니면 <수원>이 공동 취재한 기사를 먼저 실었나? 아, 혼란하다. 무엇보다 굳건히 신앙을 지키는 멀고 먼 요하네스버그의 교우들께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힘내시라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히브 11,1)

/김유철 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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