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5월 11일자 2598호 <가톨릭신문>과 969호 <평화신문>이다.

평화신문 1면 톱

평화신문 8면 서울대교구 대변인 성명서

교회는 친일 했지만, 개인은 친일하지 않았다!

5월 11일자 교회신문들의 사설은 이렇게 적어야 솔직한 것이다. 그것이 말하고 싶은 결론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5월 11일자 신문을 장식한 ‘친일명단’에 대한 교회신문의 기사를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했다. 불행한 시절의 어두운 과거이지만 해방된 지 무려 60여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그 시절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당시의 친일부역자 혹은 반민족행위자가 여전히 해방 후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사회의 ‘메인스트림’과 기득권층에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역에서는 더욱더 그런 영향이 짙다. 이런 것을 그들의 용어로는 ‘암약’하고 있다고 한다.

‘화해와 쇄신’은 일회용이 되어서는 안된다.

‘친일명단’과 관련하여 <가톨릭신문>은 2면 “친일 행적 구체적 증가 있나”, 4면 사설 ‘친일 인사 명단, 단 한명의 억울함도 없어야’를, <평화신문>은 1면 톱 “가톨릭인사 ‘친일 명단’ 포함 유감”, 2면 사설 ‘친일 명단, 숨겨진 진실을 살펴라’, 8면 해설기사 ‘겉만 보고 압니까, 속을 봐야 압니다’를 올렸다.

한 마디로 기가 막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가톨릭계 친일대상자를 딱 7명이라고 발표하는 순간 귀를 의심했지만, 교회신문의 반응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2000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미사 중의 참회 예식 때에 우리의 가슴을 쳤던 아픔을 기억한다면 경성교구의 후신인 서울대교구 대변인은 「가톨릭인사 ‘친일명단’ 발표에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서가 아니라 「참회합니다. 또 참회합니다. 거듭 거듭 참회합니다.」로 시작하는 고백서가 제격이다. 또한 <가톨릭신문>은 「경성교구 외에도 친일자가 있었다」로, <평화신문>은 「속을 보면 우리의 부끄럼이 더 깊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며, 21세기를 맞으며 한국교회가 고백한 ‘화해와 쇄신’의 실천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과 8년 전의 그 일은 이벤트 혹은 쌩쑈 였다고, 그것도 미사 중에 하느님 앞에서 거짓 참회한 또 하나의 죄업이었다고 단정해도 좋은가? 기억을 도와주는 의미해서 우리가 했던 고백을 인용한다.

+ 형제 여러분,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한국 교회의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그 동안 하느님과 민족 앞에서 잘못한 점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이러한 우리의 잘못을 참회하고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간절히 용서를 청합시다.

(일곱 가지 중 두 번째)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 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신문이 지닌 ‘친일문제’의 관점은 슬프다.

<평화신문>에 관련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2006년 5월 21일자 872호에서 <경향잡지> 창간 100주년 기념학술 세미나를 취재 한 바 있다. 그는 당시 세미나의 발제문중 자신이 인용한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경향잡지>의 지나온 100년 역사동안 과오가 있다면, 특히 일제 치하 친일 행각은 반성하고 회개해야 한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반성과 회개가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을 인용하여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불과 2년 만에 친일대상자 명단에 대하여 ‘겉만 보고 압니까, 속을 봐야 압니다’라고 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아니 그것이 교회신문이 친일문제를 보아온 관점인 것이다.

놀랍게도 신문에 보도된 서울대교구 대변인의 성명서에는 명단의 발표문을 슬쩍 축소하고 있다. 대변인은 친일파를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해 우리민족 또는 타 민족에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해를 끼친 자’로 인용했지만 명단발표문에는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 간접적으로 피해를 끼친 자’이다.

교회언론이 회피하려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려면 한 주로는 모자란다. 몇 주가 될지 모르지만 조금 더 비평을 연장한다. 다음 주는 ‘다카키 마사오는 대통령이 되었고, 오카모토는 주교가 되었다’이다. 기다리시라!
 


/ 김유철 200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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