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6월 29일자 2605호 <가톨릭신문>과 976호 <평화신문>이다.

 
‣ 사설은 얼굴이다.

신문사의 ‘사설’(社說)을 굳이 말로 풀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밥 먹는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한마디로 신문사의 주장이며 관점이다. 우리는 그 사설로서 신문사가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 무엇을 생각하며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를 한 눈에 알 수 있다. 5월과 6월 두 달간의 교회신문의 사설을 살펴보자.

 



‣ <평화신문>은 23건 중 제로!

같은 기간 안에 <평화신문>이 <가톨릭신문>보다 사설 건수가 많은 것은 <가톨릭신문>이 두개의 사설이 기본이 반면, <평화신문>은 세 개의 사설이 실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사설’은 해당주간의 이슈에 대한 신문사의 공식주장을 내어놓는 자리이다. 사설이란 것을 독자들이 눈여겨보지는 않지만 제목만으로도 독자들은 충분히 신문사의 논점을 간파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설을 비교하였던 5월과 6월 두 달 동안 한국사회를 달구었던 아니 아직도 진행 중인 이슈가 있다. 말해 무엇 하겠는가? 초등학생부터 유모차를 끄는 주부와 팔순노인까지 거리에서 두 달이 넘도록 국민들이 외치는 구호가 있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정부가 냉 ‧ 온탕을 오락가락 가는 통에 온 국민의 정신건강이 심각한 적신호상태이다. 그런데도 교회신문의 사설은 딱 두 번 있었다. <가톨릭신문>의 5월 18일자와 6월 8일자 사설이 그것이다. 혹시 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6월 8일자 전문을 인용한다.

‣ 명문이다.

인간 존엄성과 공동선 위한 정치 촉구한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를 둘러싼 범국민적 저항은 작금의 정치적 권위가 과연 누구를 위하여 행사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애당초 국민의 건강권에 대한 수호 차원에서 시작된 광범위한 계층의 시민들을 망라한 촛불집회는 이제 이 정권의 도덕성과 정책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더욱이 정부는 잘못된 정치와 정책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배후가 있다는 등의 눈가림과 꼼수로 임기응변식으로 넘어가려는 오만과 독선, 무책임의 행태를 보여 옴으로써 오히려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고, 심지어는 지극히 평화적인 집회 참가자들을 강경 진압함으로써 많은 부상자를 야기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최근 정국을 인내로 지켜보았으나 더 이상은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인식하고,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를 중심으로 시국 집회를 개최하고 성명서를 발표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을 촉구하고 나섰다.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6월 3일자로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경제 성장보다 국민과의 소통, 도덕성 회복이 우선”이라는 뜻을 피력하고, 이명박 정부의 변화를 5개항에 걸쳐 촉구했다. 또한 이에 앞서 전주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정의구현 전주교구 사제단은 5월 30일 시국미사를 봉헌하고 거리 행진을 벌였으며,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를 철회하고 재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 표시가 정치적 권위는 국민으로부터 나오며, 국민들이 위탁한 것이고, 따라서 정부는 인간의 생명과 기본권을 존중하고, 공동선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통치 행위를 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정부의 국정 운영의 근본 기조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즉 비록 경제 성장과 개발이 국가 발전에 중차대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것이 “정직, 책임감, 진실, 공동선“ 등 도덕적 가치, 그리고 인간 존엄성과 생명 보호,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등의 가치를 희생해야 하는 이유는 되지 못함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명박 정부에게 남은 일은 통절한 자기 성찰이며, 진지하고 겸허한 반성에 바탕을 둔 근본적인 변화 뿐이다. 어설픈 미봉책으로는 더 이상 바닥까지 떨어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길은 전혀 없을 것이다.

‣ <가톨릭신문>의 사설에 경의를 표한다.

사설횟수가 두 달 동안 23건이 되는 <평화신문>이 ‘하안거 피정’하는 동안 더 보수적인(?) <가톨릭신문>의 논점이 눈에 띄인다. 물론 그것이 기사로 연결되지는 못하는 점이 한계이지만 조목조목 입장을 밝힌 점은 참으로 놀랍다. 물론 <조중동>을 제외한 일반 신문에는 다반사로 실리는 수준의 사설을 보고 감탄하는 비평자가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다. 이 정도라도 교회신문에서 보는 것은 신선하다. 하는 김에 덧붙이자. 6월 8일자 사설에서 <가톨릭신문>이 힘주어 논지를 편 “작금의 정치적 권위, 국민의 건강권, 정권의 도덕성과 정책 방향, 잘못된 정치와 정책, 눈가림과 꼼수로 임기응변식으로 넘어가려는 오만과 독선, 무책임의 행태, 강경 진압, 정직, 책임감, 진실, 공동선등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거나 더 악화되어가는 형편이다. <가톨릭신문>의 계속적인 관심과 교회신문으로서의 예언자 역할을 기대한다.

‣ 사도 바오로의 말을 듣고 분발했으면

<평화신문>이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에 있어 몇 차례 사실보도 한 것을 애써 인정한다고 하여도 기사에서 다 말할 수 없었던 신문사의 정식의견이라 할 수 있는 ‘사설’에 인색한 점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종교 주간지인 탓에 사회적 ‧ 정치적 문제를 가지고 1면 톱에 기사를 올릴 수 없는 정체성의 한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시대적 징표를 복음적인 눈으로 읽는 것은 종교언론인의 마땅한 의무이며 소명일 것이다. 지리적인 입장에서도 <평화신문>은 촛불문화제라 표현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바로 창문만 열어도 들을 수 있는 위치 아닌가? 그 언젠가 로마의 구중궁궐에서도 “창문 좀 열어라. 답답하다.”라고 말한 지 40여년이 지나가고 있다. 교구마다 성경일기‧ 성경쓰기가 유행이라고 한다. 아무리 바빠도 <평화신문> 길 건너 명동성당에 앉아서 성경책을 펼쳐라. 거기에 이렇게 바오로사도의 말씀이 있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그러고 보니 올해가 사도 바오로의 해이기도 하다. 논설위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김유철 200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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