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7주차가 되자 마산에 있는 조산원 원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이제부터는 아기가 언제든지 나올 수 있어요. 둘째부터는 별다른 가진통 없이 분만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진통 시간도 훨씬 짧아지고요. 그러니까 아기 나올 기미가 보이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연락을 주세요. 혹시라도 아기가 먼저 나오면 탯줄 끊지 말고 그대로 배 위에 얹어 놓고 기다리고
“엄마, 배고파.”다울이가 아침 인사 대신 늘 하는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배가 고프다고 하니 눈 뜨자마자 먹을거리를 잠들기 전에 챙겨놓고는 한다. 그런데 하루는 준비 없이 잠들어 전날 남은 밥 한 공기조차 없었다. 먹을 걸 내놓을 때까지 다울이의 배고파 타령이 이어질 텐데 이를 어쩌나. 빨리 고구마라도 삶아야 했다. 마음이 급하니 고구마를 압력솥에 얹어
어떤 아메리카 인디언 추장은 ‘어떻게 땅을 사고판단 말인가’라며 탄식을 했다지만, 시골에 살아보니 적어도 먹을거리를 자급할 정도의 땅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내 땅이 아니고는 내 방식대로 농사를 마음 놓고 지을 수도 없고, 내 방식대로 짓는 농사로 일 년 임대료를 감당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도 지난해 문중 소유 밭을 700여
밤이면 밤마다 산개구리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울려 퍼지니 드디어 봄이로구나 실감을 한다. 게으름에 익숙해졌던 몸과 마음이 겨울 끝자락을 못내 아쉬운 듯 바라보기도 했지만, 날이 풀리니 저절로 움직임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집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밭에 무성한 냉이를 캐며 냉이 뿌리에 코를 들이대고, 쑥은 얼마나 컸나 머위는 싹이 났나 안부를 물으러
며칠 전에 끝집 아저씨가 찾아오셔서 속을 뒤집어 놓고 가셨다. 언제나 대화의 주제는 누군가에 대한 험담. 누군가에 대한 험담에서 시작해서 목에 핏대를 올리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다가 다시 험담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면서 우리를 무척이나 생각해주는 척 협박 비슷한 것까지 하신다. ‘마을의 누군가가 너(우리 신랑)를 아니꼽게 생각해서 손봐줄 기회를 엿보고 있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합천에 살 때 “이모! 이모!” 하며 나를 잘 따르던 이웃집 아이 구현이. 휴대폰으로 연이어 문자를 보내오길래 “너 심심하냐? 그렇게 심심하면 이모 집에 놀러 와라.” 했더니 정말 그날 즉시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마침 구현이네 집에 와 있던 손님이 구현이를 순천까지 바래다줘서, 우리 신랑이 순천으로 마중을 나가 데려오게 된 것!
농부에게 겨울은 기나긴 방학이다. 불 때고 나무하고 밥하는 일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그동안 잊고 있던 그리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떠올려보게 된다. 누구는 잘 있을까? 누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러다가 참을 수 없이 그리움이 솟구쳐 오르면 ‘지금 만나러 가보자!’하고 길을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탓에 쉽게 길을 나서지 못했
밤사이 내린 눈에 온 세상이 눈밭이 되었다. 이런 날은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이 느껴져 마음이 한없이 느긋해진다. 어디 갈 데도 없겠다 가려야 갈 수도 없겠다, 그래서인지 겨울잠 자는 곰처럼 마음껏 게을러지고 싶다. 만약 혼자 사는 몸이었다면, 눈 오는 날만큼은 밥도 먹지 않고 온종일 방바닥에서 뒹굴었을 것이다.하지만 딸린 식구들이 있으니 그럴 수가 있
저녁엔 간단하게 떡국이나 끓여 먹을까 하고 다싯물을 올리고 가스레인지를 켰다. 그런데 가스가 다 떨어졌는지 불꽃이 이내 꺼져버렸다. 서둘러 신랑을 불러 가스통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스통 하나를 여유분으로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우리 집뿐 아니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만약에 대비해서 가스통을 두 개 이상 채워 놓고 산다.)
며칠째 눈이 내리고 있다. 그쳤다가 내렸다가, 잠깐 그쳤다가 또 내렸다가…. 온 세상은 벌써 하얗게 뒤덮여 날씨와는 상관없이 따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눈은 차가운데 왜 이다지도 따스해 보이는 걸까? 더러운 곳이나 깨끗한 곳 가리지 않고 어디나 덮어주는 포근함 때문일까? 그 따스함을 바라보며 내 안의 매서운 추위를 부끄럽게 바라본다.최근 들어 옆
언제 바빴던가 싶게 한가로워졌다. 콩이나 팥을 추리고 고르는 일이 남았지만 그건 겨우내 심심풀이로 하면 되지 싶어 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집 주변 정리도 해야 하고, 밀린 집안일에 김장 준비에 할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은 벌써 방학을 맞이했다. 곳간에 일 년 내 먹을 쌀이 쌓여 있고, 불 땔 나무도 넉넉하니 이 어찌 여유롭지 않으리오
한때는 나도 시골 사람들의 배타적 정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골에 살다 보니 도시에서 온 외부인들을 곱게 바라보기가 어렵다. 짧은 경험으로 봤을 때, 연고가 없는 외부인들은 대게가 약탈을 목적으로 마을을 찾아오기 때문이다.봄철 산나물이며 죽순을 시작으로 가을에는 버섯까지 각종 약초를 채취하러 오는가 하면, 개구리 잡으러 오는 사람, 멧돼지 잡으러
그동안 나는 무릉도원에 다녀왔던 걸까? 2주 만에 집에 돌아와서 마을 분들을 만나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불과 2주 사이에, 어떻게 저렇게 서리 맞은 호박잎처럼 파싹 늙으실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다. 내가 없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이들 크는 것도 무섭지만 어르신들 늙는 것도 순간이구나 싶어서 마음 한구석이 애잔했다.그리고 열흘 뒤, 거울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임신을 하니 ‘맛’에 민감해지게 되고, 자꾸만 옛날 맛이 생각난다. 둥지가 들어서고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순대볶음인데, 그것도 그냥 순대볶음이 아니고 서울 봉천동 중앙시장 엄마손 순대볶음이 먹고 싶었다. 오죽하면 택배로 순대볶음을 보내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을까. 결국 아쉬운 대로 화순에 나가서 먹고 오긴 했는데, 먹고
추석 연휴 하루 전날, 사랑방 바닥에 콩댐해야지 며칠 집을 비우기 전에 집단속도 해야지 신랑도 나도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범수 아빠가 오셨다. 오늘도 술을 잔뜩 드셨는지 발자국 소리까지 비틀거린다. 제발 좀 그냥 가 주셨으면 싶어 일부러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다울아! 제수씨!”하고 부르며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오신다. 손
지구온난화다 뭐다 하는 얘기를 들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올해 몇 차례 태풍을 겪으면서 그 심각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균형을 잃어버린 지구 생태계를 회복하기 위해 자연은 또 어떤 몸부림으로 인간에게 말을 걸까. 또한 태풍 피해가 도시보다는 시골에 집중되는 것을 보면서, 농부로 살아갈 앞으로의 나날이 막막하고 두렵게 여겨지기도 한다.앞서 올린 글에 밝혔
태풍이 무섭다는 걸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태풍 볼라벤이 다녀가던 날 밤, 이웃집 축사 지붕이 하필이면 우리집 쪽으로 날아와 슬레이트로 된 우리 지붕을 내려찍고 지붕 처마를 다다다닥 긁으면서 날아간 것이다. 그 때문에 부엌 천장은 아예 뻥 뚫려 하늘이 보이고, 마루와 큰방에도 비가 새어 들어오는 지경이 되었다. 지붕이 뚫린 곳을 임시로 커다란 천막 같은 것
살인 더위라 일컬어지던 지난 여름을 군소리 한 마디 없이 물에 발 한 번 담그지 않고 묵묵히 보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신랑이다.“폭염 경보가 울렸으니 낮 열두 시부터 네 시까지는 절대 야외에서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마을 스피커에서 이런 내용의 방송이 몇 번씩 흘러나와도 그러거나 말거나, 비지땀을 흘리며 사랑방 공사를 했다. 추워지기 전에, 그
도시 사람들에게 휴가철이 이곳에서는 손님맞이 철이다. 마을은 휴가를 보내러 온 도시 사람들로 오랜만에 북적거린다. 냇가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밤새 마을 정자에 붉을 밝히고 노는 어른들…, 그야말로 한바탕 잔치가 열렸다. 우리 집에도 7월 초부터 손님이 찾아오기 시작해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까지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손님이 이어졌다. 사
"이모! 저 왔어요." "다울아! 형아 왔다."아침 여섯 시가 조금 넘었으려나? 범수가 큰 소리로 부르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피곤이 몰려오고 짜증이 일었다."범수야, 다울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상태가 좀 안 좋거든. 아침밥 먹고 나서 이따가 놀러와. 알았지?"나는 다울이 핑계를 대며 억지로 범수 등을 떠밀어 집으로 보냈다. 범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