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18]

저녁엔 간단하게 떡국이나 끓여 먹을까 하고 다싯물을 올리고 가스레인지를 켰다. 그런데 가스가 다 떨어졌는지 불꽃이 이내 꺼져버렸다. 서둘러 신랑을 불러 가스통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스통 하나를 여유분으로 채워 놓았기 때문이다.(우리 집뿐 아니라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만약에 대비해서 가스통을 두 개 이상 채워 놓고 산다.) 그런데 이럴 수가! 밖에서 신랑이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다.

“큰일났네. 가스통이 둘 다 비었어요. 가스 넣은 지 얼마나 됐죠?”

기억을 더듬어보니 3~4개월 정도밖에 안 됐지 싶다. 그런데 벌써 두 통을 썼다고? 말도 안 된다. 몇 개월 사이에 가스통을 교환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언제 한 통이 빈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가스가 샜던 것일까?

간단하게 저녁 준비를 하려 했는데, 가스가 떨어졌으니 낭패였다. 할 수 없이 다싯물 따로 내고 어쩌고 하지 않고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사랑방 가마솥에 중탕으로 익혔다. 시간이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20~30분 정도 지나가 냄비가 들썩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고, 떡국도 아주 맛있게 끓었다. 그것으로 밥상을 차리고 김치 한 가지에 저녁을 먹는데, 신랑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우리, 가스통 채우지 맙시다. 부엌에 부뚜막도 있겠다 사랑방 아랫목에 가마솥도 있겠다 굳이 가스레인지 안 써도 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불안한데….”

▲ 아궁이 불 위에서 달걀부침이 익어간다. 익었다 싶으면 바로 꺼내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정청라

밥상 장만을 책임지는 내 입장에서는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그동안도 밥은 불 때서 가마솥에 해왔으니 별로 어려울 것 없겠지 싶으면서도,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제약이 많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손님이 오신다거나 해서 음식을 다양하게 준비해야 한다던가, 후다다닥 밥을 해야 할 때는 어쩌나. 게다가 불 때서 밥 준비를 하려면 아무래도 신랑 도움 없이는 어렵지 않나.

그러나 고심 끝에 가스를 채우지 않기로 결정했다. 가스를 채워 놓으면 안 써야지 안 써야지 하면서도 쓰게 되는 게 사실이니까. 또한 하루가 멀다 하고 가스 값이 치솟는 형편이니 언제까지 가스에 의존하고 살 수도 없지 않나. 그래서 이번 기회에 시험 삼아, 아주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다음날, 곧바로 난관에 부딪혔다. 미역국을 끓이려 하는데 미역 볶을 불을 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미 가마솥에는 밥이 앉혀져 있었고 숯불 위에는 다싯물이 올라가 있었으니까. 다싯물을 잠깐 내려놓고 볶을까도 싶었지만 화로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은근해서 무언가를 볶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휴대용 버너라도 있나 싶어 이리저리 뒤지다가 구석진 곳에 쳐 박혀 있던 전기레인지(?)를 꺼내 와서 거기에 미역을 볶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랑 왈!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게 전기를 얼마나 많이 먹는데…. 가스 안 쓰겠다고 하고서는 전기 쓰는 거예요?”
“잠깐만 볶으면 돼요. 미역국은 미역을 볶아서 끓여야 맛있단 말이에요.”

그렇게 우물쭈물 변명을 하고서는 기분이 아주 안 좋아졌다. 잠깐이면 된다는 생각에 전기의 힘을 빌린 건데 그걸 이해 못하고 나무라는 신랑도 얄밉고, 가스 불 안 쓰는 첫 날부터 가스 불의 빈자리를 느끼는 내 수준도 한심하고…. 그래서 다시금 고민을 하게 되었다. 가스를 쓸까 말까 쓸까 말까….
그리하여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괜히 신랑에게 눈칫밥 먹느니 솔직하게 내 수준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신랑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가스통 채웁시다.”

하지만 신랑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됐어요. 가스 없어도 잘 먹고 있잖아요.”

이렇게 한 마디 말로 내 의견을 싹둑 잘라 먹지 뭔가. 워낙 고집이 센 사람인지라 나는 투덜투덜하면서도 더 이상 말도 꺼내지 못했다. ‘됐다 됐어. 대충 먹고 살지 뭐.’ 이런 마음으로 그 뒤로 2주 가까이 가스 없이 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이 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지는 건가? 처음에는 무지 불편하고 가스불이 없어서 할 수 없는 것들만 떠올랐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가스불이 없기에 할 수 있는 것들도 많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 밥상을 놓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다울이. 밥이 되기만을 목 빼고 기다렸던지라 "밥 먹자!" 소리를 기다릴 새도 없이 숟가락을 든다. ⓒ정청라

무엇보다 좋은 점은 요리 방법이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가급적 굽거나 찌는 방식의 요리를 하게 되고, 괜히 이것저것 가짓수를 늘이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무를 볶아서 무나물을 해 먹었다면, 이제는 밥에 무를 얹어 무밥을 해 먹고 마는 식이다.

그리고 신랑과 손발 척척 맞추어 가며 밥 준비를 하다 보니, 이제는 밥 하는 일이 전적으로 내 일이 아니라 공동의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신랑에게 영역 침범을 당하는 것 같은 생각에 괜히 자존심을 세우기도 했는데, 이제는 서로 의논해서 밥 준비를 하는 게 더 편하고 부담도 훨씬 덜 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가스 없이 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 년에 몇 달, 농한기인 겨울만이라도 이렇게 살아봐야지 싶다. 그냥 재미 삼아서, 밥 짓기를 하나의 놀이로 여긴다면 이것도 꽤 해볼 만한 일이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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