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16]

언제 바빴던가 싶게 한가로워졌다. 콩이나 팥을 추리고 고르는 일이 남았지만 그건 겨우내 심심풀이로 하면 되지 싶어 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집 주변 정리도 해야 하고, 밀린 집안일에 김장 준비에 할 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은 벌써 방학을 맞이했다. 곳간에 일 년 내 먹을 쌀이 쌓여 있고, 불 땔 나무도 넉넉하니 이 어찌 여유롭지 않으리오. 밖에 나갈 일만 줄인다면 돈이 없어도 걱정이 없는, 그야말로 배부르고 등 따순 나날이다.

▲ 툇마루로 통하는 누덕누덕 누더기문. 한지에 밥풀을 발라 새들이 쪼아 놓은 구멍을 막았다. ⓒ정청라
마음이 이렇게까지 여유로울 수 있는 건 아무래도 사랑방이 생긴 덕분이지 싶다. 기름 값이 무서워서 벌벌 떨 일이 없으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특히 바람 불고 쌀쌀한 날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허리를 대고 누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방이 크지 않으니 불을 많이 땐다고 해도 땔감이 많이 들지도 않지, 전기 설비를 안 해서 전기가 안 들어오니 쓸데없는 짓 안 하고 일찍 잠들 수 있어서 좋다. 그뿐인가. 아랫목에 가마솥 오븐이 있으니 저녁에 불 땔 때 고구마를 넣어 두었다가 다음 날 아침에 꺼내어 먹으면 그게 바로 아침밥이다. 사랑방 덕분에 삶이 더욱 간소하고 풍성해졌다고 해야 할까?

우리 집 사랑방이 좋은 걸 어찌 알았는지 더부살이 식구들까지 생겨나고 있다. 툇마루 옆 지푸라기를 쟁여둔 작은 창고 공간엔 도둑고양이가, 천장 위엔 생쥐가, 처마 밑엔 새들이 자주 들락거린다. 한 번은 낮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세게 두드려서 “누구세요?”하며 화들짝 놀라 일어났는데, 알고 보니 새들이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그랬는지 부리로 창호문을 세게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도 새들은 틈틈이 날아들어 창호문 곳곳에 구멍까지 냈다.(결국 구멍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무시 못 할 정도가 되어 하루 날을 잡아 구멍 때우기를 해야 했다.)

생쥐는 또 어떤가. 밤새 무얼 그리 열심히 하는지 사각사각, 드르르륵, 쓰으쓰윽, 후다다닥, 온갖 소리를 다 낸다. 간혹 자다가 깨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면 상상력이 날개를 달아 별별 그림이 다 떠오른다. 늠름한 생쥐 총각이 각시를 맞이하기 위해 멋진 신혼집을 꾸미고 있는 건 아닐까? 엄마 생쥐가 아기를 맞이하기 전에 집안 대청소를 하고 있을까? 솜씨 좋은 생쥐 목수가 가구를 만들고 있을까? 비몽사몽간에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가 천장에서 흙부스러기라도 떨어져 내리면, 이러다가 천장에 구멍이 나지 싶어 생쥐에게 크게 소리를 친다. “야, 이제 그만 좀 하시지. 계속 시끄럽게 하면 가만 두지 않겠어” 하면서.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몰라도 그렇게 해 두면 한동안은 잠잠해지곤 한다.

▲ 바깥 바람을 막으려고 신랑이 부랴부랴 손수 멍석을 짜서 창문 앞에 걸어두었다. ⓒ정청라

생쥐라니, 몸서리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물론 생쥐를 보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는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내 생활공간 안에서 다른 존재의 기척을 느끼는 것이 거북한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에 여러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발견이랄까, 그런 놀라운 느낌을 맛볼 수가 있다. 물론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많지만, 이게 다 생명이 깃드는 집에 살기에 치러야 하는 당연한 대가라고 생각한다. 하기야, 요즘에는 인간 외에 다른 생명은 못 깃들게 하는 ‘무늬만 흙집’도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가 이런 얘길 늘어놓는 것을 알면 우리 신랑이 따끔하게 한 소리를 할 게 분명하다. “청라씨가 직접 나무해서 불 때 볼래요? 과연 좋다는 소리만 나오는지…. 그리고 흙 발라 가며 쥐구멍도 막아 봐요. 그래도 함께 살아가는 존재니 뭐니 좋은 소리가 나오는지….” 맞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다. 나무해서 불 때 주고, 쥐들의 극성에는 나보다 앞서 쥐구멍 막을 생각을 하는 듬직한 신랑이 있기에 내가 이렇게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우리 집 사랑방이 참 좋다. 누구에게든 작은 방 한 칸 정도는 손수 지어 살아보라고 적극 권하고 싶다. 아무리 어설픈 솜씨에 얼기설기 지은 집이라 하더라도 남다른 애정이 새록새록 솟아날 것이다. 단, 너무 욕심을 내 크게 집을 지었다가는 집 짓느라 골병, 집 돌보느라 골병을 앓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 "너는 왜 네가 아니고 나인가!" 특별한 격식 없이 그냥 우리 맘대로 상량문에 새겨놓은 화두다. ⓒ정청라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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