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20]

농부에게 겨울은 기나긴 방학이다. 불 때고 나무하고 밥하는 일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그동안 잊고 있던 그리운 사람들을 한꺼번에 떠올려보게 된다. 누구는 잘 있을까? 누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러다가 참을 수 없이 그리움이 솟구쳐 오르면 ‘지금 만나러 가보자!’하고 길을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탓에 쉽게 길을 나서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 찾아오기로 했던 몇몇 사람들도 빙판길이 무서워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세 식구에게는 그야말로 게으른 나날이 찬란하게 펼쳐졌다.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기, 하는 일 없이 뒹굴거리기, 되도록 방 밖을 나가지 않기,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기까지…, 누가 보면 게으른 사람 뽑기 대회라도 하나 싶을 정도로 우리는 마냥 게으르게 지냈다. 오죽하면 마을 아주머니들이 찾아와서 도대체 방안에서 뭘 하고 지내기에 한 번도 나와 볼 생각을 않느냐며 채근을 다 했을까. 아주머니들은 마을 회관에 놀러 오라고 하시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방안에만 있어도 하루가 술술 가니 밖에 나갈 짬을 낼 수가 있어야지 말이다. 우리에게 있어 게으른 하루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시간’에서 벗어나 그냥 그대로 존재하는 시간으로, 텅 비어 있음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른 무엇을 바라거나 꿈꾸지 않아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박홍기
그런데 지난 며칠, 갑작스레 손님이 줄줄이 이어져 그동안의 삶이 발칵 뒤집혔다. 오랫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청소를 하는 것만도 얼마나 큰일인가. 누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인데, 손님 덕분에 집안 대청소도 후닥닥 해치울 수 있었다. 또, 평소에는 김치와 마른 김, 국거리만 가지고 밥을 먹었다면 오랜만에 나물도 몇 가지 하고, 생선조림도 하고, 큼지막한 호박도 잡아 호박죽을 끓이는 등 모처럼 부엌에서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사랑방뿐 아니라 본채에도 온기가 가득 차고, 오랜만에 집 전체에 활기가 감돌았다. 때마침 날씨도 따듯해져 겨울 속에서 봄을 만난 듯, 새로운 며칠이 펼쳐졌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집에 온 손님들이 저마다 독특한 사연을 가지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한 분은 석유 문명을 거부하고 수행자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분으로 올해 초 페루에 이민을 가시게 되어 작별인사를 하러 오셨다. 그분과 함께 온 젊은 처자는 오랫동안 서울에 있는 환경 단체에서 일했는데 올해 해남으로 귀농을 할 거라고 했다. 한편, 애인과 이별하고 아픔을 달래러 온 사촌 동생의 여자친구, 나와 함께 귀농을 했다가 다시 서울로 상경하여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 집도 땅도 없지만 저축하지 않고 나누며 살겠다는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착한 백수, 일 문제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여자 친구와 이별까지 결심하게 된 사촌 동생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다녀갔다.

때로는 만남이 겹쳐져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차를 나누기도 했는데,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 사이라도 되는 듯이 허물없이 마음을 나눌 수가 있었다. 이별의 아픔을 위로해 주기도 하고, 새로운 삶으로 가는 출발점 앞에 선 사람에게는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기도 하고, 어떤 어려움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이에게는 격려와 위로로 용기를 주기도 했다. 지금껏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타인들이 이렇듯이 서로 위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다.

여행이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리게 했던 걸까? 아니면 우리 집에 깃든 게으른 기운이 타인을 향한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했던 걸까? 아무튼, 우리 집이 그들에게 열림과 쉼, 치유의 공간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돌아보면 나 또한 귀농하기 전에 시골에서 살아가는 누군가의 집에서 한없는 평안과 위로를 얻었으니까. 이 세상의 속도와 가치를 따르지 않고 제 맘대로 비켜나가 있는 공간, 그것이 우리 집을 마법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지 않았을까? 지난 며칠 동안 펼쳐진 마법의 시간은 나에게도 결코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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