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19]

밤사이 내린 눈에 온 세상이 눈밭이 되었다. 이런 날은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이 느껴져 마음이 한없이 느긋해진다. 어디 갈 데도 없겠다 가려야 갈 수도 없겠다, 그래서인지 겨울잠 자는 곰처럼 마음껏 게을러지고 싶다. 만약 혼자 사는 몸이었다면, 눈 오는 날만큼은 밥도 먹지 않고 온종일 방바닥에서 뒹굴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린 식구들이 있으니 그럴 수가 있나. 다울이의 “엄마, 배고파.” 소리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밥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느닷없이 나주댁 아주머니께서 찾아오셨다.

“갑시다. 저 아랫마을에 밥 먹으러 가게.”
“네? 밥 준비 다 해놨는데 갑자기 무슨 일로요?”
“밥은 뒀다 저녁에 먹어. 이장 선거하고 밥도 얻어먹고 할 거니께.”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정말 난데없는 일이었다. 이장 선거라면 마을의 중대한 일인데 최소한 며칠 전에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일에 찾아와서 가자고 하시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작 알았으면 밥이라도 안 했을 텐데 괜히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마을 신참내기인 우리가 안 간다고 뺄 수도 없고, 마지못해 옷을 챙겨 입었다.

▲ 눈이 내리면 세상은 티없이 깨끗해진다. 눈은 우리에게 다 덮어주고 화해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정청라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랫마을 윗마을 모두 합쳐 열대여섯 명쯤 되려나? 그 사람들이 여자 대 남자로 나뉘어 따로 밥상을 두고 앉아 있었다. 우리 가족은 여자 상과 남자 상 가운데 앉아서 양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시간이 꽤 지나도록 이장 선거 얘기를 꺼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자들은 주로 지난해 농사 얘기를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남자들은 소 키우는 얘기를 화제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점심상이 차려지고 점심을 들기에 앞서, 윗마을 아랫마을 통틀어 최고 연장자이신 동티 어르신이 “내 얘기 좀 들어보드라고.” 하면서 말을 꺼내셨다.

“며칠 전에 이장이 찾아와서 ‘이장 임기가 끝나가는디 마땅히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지가 2년만 더 했으면 합니다.’하고 상의를 하드라고. 그래서 내가 좋다고 했제. 그동안 이장 함시로 경험도 있고 마을 사정도 밝고 하니께 괜히 능력 없는 젊은 사람한테 맽기는 것보단 낫지 안 낫겄는가.”

그 말씀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장님도 한 말씀 하셨다.

“지도 말씀 좀 드릴랍니다. 지가 2년 동안 특별히 한 일은 없지마는 나름대로 애는 많이 썼어라우. 근디 워낙에 군 재정 사정이 안 좋다보니께 제대로 이뤄진 일은 없는디, 새해부터는 차차 추진이 될 거구먼요. 아무튼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더 열심히 해볼랑게요.”

곧이어 아랫마을 구천 아저씨가 마무리 조로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아이고, 박수 한번 칩시다. 최고 웃대가리 어르신이 그러자 하는데 쫄병들이 별 수 있나요. 이장님이 심들더라도 쪼까 더 애쓰쇼. 박수!!!”

그렇게 해서 박수 소리와 함께 이장 선거가 마무리되었다. 마치 개그 콘서트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선거일의 당일 통보, 후보 추천 과정 무시, 투표 생략, 이렇게 일사천리로 이장 재신임이 결정되다니! 어쩌면 이렇게 명쾌하고 빠르고 우스운 선거가 있을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웠다. 물론 내용과는 관계없이 굉장히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였기에 그 속에서 폭소를 터뜨릴 수는 없었지만, 정말이지 배꼽 빠지게 웃고 싶은 상황이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싣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수봉댁 아주머니가 슬쩍 웃으면서 이런 얘길 하셨다.

“인자 나 아는 사람이 그러는디, 자기도 공무원이라는 거여. 그래서 니가 뭔 공무원이냐 했더니 ‘내가 이장이여. 이장도 나라에서 봉급을 받는 사람인께 공무원이나 마찬가지제.’ 하더랑께. 요즘은 이장도 공무원인 시상이여.”

그 말씀에 너도나도 맞장구를 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면사무소 직원들 밥 사줘가며 서로 이장 하려고 한다는 얘기부터, 요즘 세상에 제 이득 챙길 속셈 없이 이장 할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얘기까지, 그제야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다 뱉어내셨다. 이렇게 할 말이 많은 분들이 마을회관에서는 어떻게들 참고 계셨는지…. 차창 밖으로 눈 덮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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