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 - 26]

임신 37주차가 되자 마산에 있는 조산원 원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부터는 아기가 언제든지 나올 수 있어요. 둘째부터는 별다른 가진통 없이 분만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진통 시간도 훨씬 짧아지고요. 그러니까 아기 나올 기미가 보이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연락을 주세요. 혹시라도 아기가 먼저 나오면 탯줄 끊지 말고 그대로 배 위에 얹어 놓고 기다리고요.”

전화를 받고 나니 애 낳을 때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면서 이런저런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마산 조산원에서 우리 집까지는 차로 세 시간쯤 걸리는 거리. 원장님 말씀처럼 원장님이 도착하시기 전에 둥지가 태어나면 어쩌나. 게다가 우리 집은 큰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마을 진입로를 찾기가 쉽지 않아 처음 찾아오는 사람은 길을 찾느라 애를 먹고는 한다. 그러니 만약 한밤중에 진통이 시작된다면 원장님이 길을 찾느라 헤매게 되실 게 뻔하다. 나는 걱정스런 마음에 둥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둥지야, 우리가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딱 한 가지만 부탁할게. 부디 멀리서 오시는 조산원 원장님이 길을 헤매시지 않도록 밝을 때 문을 두드려주렴.”

둥지가 그 말을 알아들었던 것일까. 4월 19일 이른 아침, 예정일보다 보름께나 먼저 배가 사르르 아팠다. ‘설마 벌써 나오려나’ 싶으면서도 어쩐지 둥지를 만날 것 같은 예감에 낌새를 살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슬이 비쳤다. 그 즉시 조산원 원장님께 연락을 하고 밭에 나가 있는 신랑도 불러들였다. 지금 당장, 둥지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해서 기저귀와 옷가지도 제대로 정리해두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신랑과 나는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집 안팎을 정돈했다. 둥지를 맞이하게 될 안방부터 치우고, 따끈하게 불도 때고, 급한 대로 당장 필요하게 될 기저귀와 배냇저고리 같은 것도 챙겨두었다. 다울이 때는 배가 아프면 배 아픈 것에만 집중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집에서 아기를 낳으니 이런저런 할 일을 하느라 아픈 데 마음을 둘 여유가 없었다. 배가 아프면 잠깐 멈춰 있다가 괜찮아지면 몸을 움직이며 내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애 낳는 날에도 이렇게 일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놀랍게 다가왔다.

오전 10시경에 원장님이 도착하셨다. 쑥떡과 고구마로 간단한 아침상을 차리고 함께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진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원장님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오늘 애가 나올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갑작스레 진통이 사라지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원장님께서 내진을 해 보시더니 자궁문이 반쯤 열렸지만 상당히 두꺼워서 다 열리려면 센 진통이 자주 와야 한다고, 몸을 많이 움직이면 진통이 오기 쉬우니 같이 산에 가자고 하셨다.

그래서 다울이와 나, 원장님 이렇게 셋이서 나물 가방을 들고 산에 올랐다. 올라가서 쑥이랑 머위, 취나물도 뜯고,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물을 하고 있는데 별다른 진통 없이 양수가 터졌다. 원장님이 이러다가 급하게 분만이 진행될 수 있다며 집으로 가자 하셔서 보드라운 쑥밭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도 센 진통이 오지 않고 사르르 아프다 마는 정도였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다며 원장님은 잠깐 눈을 붙이러 방에 가시고, 나는 점심 준비를 했다. 점심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진통이 왔다가 갔다가 했지만, 이 정도로는 애가 나오지 않겠다 싶어 개의치 않고 몸을 움직였다. 도대체 언제쯤 애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점심을 차리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도대체 얼마 만일까. 아주 오랜만에 마을에 금줄이 걸리었다. ⓒ정청라

마침내 밥 준비가 되어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밥을 먹으며 조산원 원장님의 경험담을 재미나게 듣고 있는데, 진통이 세게 오기 시작했다. 원장님 말씀이 하도 재미있어서 아픈 걸 꾹 참고 듣고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밥상을 치우러 일어나는 참에 서둘러 화장실로 달려갔다. 변기에 앉아 있으면 진통을 참기가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울이 낳을 때도 변기에 앉아 있다가 애 머리가 쑥 나와 손으로 애 머리를 받쳐 들고 나온 경험이 있기에 이번에도 변기에 앉아 빨래 바구니를 끌어안고 아픔을 견디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리가 저려서 괴롭던 참에 조산원 원장님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괜찮아요? 방으로 들어와요. 옆으로 누워 있으면 잠깐씩 쉴 수 있으니까 수월할 거예요.”

그 말씀을 듣고 힘을 내어 방으로 달려갔는데, 방에 엎드리자마자 허리 위로 불덩이가 지나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옆으로 누웠는데 참을 수 없는 진통이 계속되어 식은땀은 줄줄 흐르고, 어느새 아랫배에 저절로 힘이 막 들어갔다. 그러더니만 순식간에 뭐가 쑥 빠져나왔다. 그때가 오후 4시 2분, 점심 먹고 한 시간도 채 안 지난 상황이었는데 벌써 애가 나온 것이다.

“애기 아빠! 얼른 와요. 애 머리가 나왔어요.”

다울이 때도 생각지도 않다가 애가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신랑은 이번에도 “벌써 나왔어요?” 하며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아빠와 함께 따라 들어온 다울이는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싫은 감정을 드러냈다. “동생 싫어. 동생한테 인사 안 할 거야” 하면서 말이다. 저 녀석이 왜 저러나 싶어 당황해하는 사이, 노련한 조산원 원장님이 다울이에게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다울아, 내가 마술 보여줄까? 다울이가 동생한테 인사하면 동생이 눈을 뜰 거야.”

그 말씀에 다울이가 둥지에게 볼멘소리로 말을 건넸다.

“둥지야, 안녕? 내가 네 형이야.”

그러자 정말 마술처럼 둥지가 눈을 떴다. 뿐만 아니라 마치 “안녕” 하고 말하는 듯이 한 손을 흔들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걸 보고는 다울이 마음이 누그러졌는지 곧이어 동생에게 관심을 보이며 귀여워했다. (물론 그 뒤로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심술을 부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둥지를 맞이했다. 하느님의 완벽한 시나리오 속에서 특별하면서도 특별하지 않게, 어렵지만 어렵지 않게 말이다. 이렇게 큰일을 치를 때마다 ‘삶은 큰 축복’임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되고는 한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