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15]

▲ 다울이는 이렇게 놀아요. 하나, 신나게 땅콩을 따면서! ⓒ정청라

한때는 나도 시골 사람들의 배타적 정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골에 살다 보니 도시에서 온 외부인들을 곱게 바라보기가 어렵다. 짧은 경험으로 봤을 때, 연고가 없는 외부인들은 대게가 약탈을 목적으로 마을을 찾아오기 때문이다.봄철 산나물이며 죽순을 시작으로 가을에는 버섯까지 각종 약초를 채취하러 오는가 하면, 개구리 잡으러 오는 사람, 멧돼지 잡으러 오는 사람, 그것도 아니면 농작물을 싸게 사러 오는 사람까지, 뭐든지 남김없이 싹쓸이해갈 작정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설령 단순히 등산객으로 찾아오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을 사람들을 동물원 원숭이 바라보듯이 대하는 시선을 하고 있어서 마주치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 다울이를 보고 이 산중에도 아이가 있냐며 신기해하면서 사탕이나 먹던 과자를 던져주고 갈 때면, 문명인이 원시인에게 선심 쓰는 양 느껴져 모욕감까지 들었다.(물론 다울이는 아주 기뻐했지만. ^^;)

지난 주말, 주말이라 그런지 그날도 못 보던 사람들이 자주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뒤늦게 마늘을 심느라 집 앞 텃밭에서 쪼그리고 앉아 부지런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고맙게도 다울이는 수숫대를 가지고 밭고랑 사이를 누비며 혼자서도 신나게 놀고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지나가던 모르는 아줌마 한 분이(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할머니께 들깨를 사러 온 사람이었음) 한 마디 툭 던지고 간다.

“어머, 이 집 무는 어찌된 게 자라다 말았네.”

▲ 둘, 아빠가 나락 터는 일을 도우면서! ⓒ정청라
그 아줌마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겠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우리 집 무가 어떤 무인데 그런 말을 한다는 말인가. 태풍 피해로 지붕 수리를 하느라 심어 놓은 무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못했을 무렵, 벌레들의 공격에도 살아남아 씩씩하게 자란 무였다. 제 때 풀을 매주거나 웃거름 한번 제대로 주지 못해 다른 집 무에 비해 형편없이 작지만, 그래도 얼마나 야물게 자랐는지 볼 때마다 흐뭇해지곤 했다. 그런데 함부로 그런 말을 하다니 말이다.

괘씸하다 생각하고 있는 사이, 그 아줌마가 또 다시 우리 밭 앞을 지나가며 이번에는 다울이를 보고 한마디 했다.

“이 산중에 애라고는 너 하나뿐이니 얼마나 심심하냐. 쯧쯧.”

친절하시기도 하지, 이번에는 우리 집 애까지 걱정을 해 주시지 뭔가. 심심하다고 떼라도 쓰고 있었으면 모를까, 잘 놀고 있는 애한테 순전히 아줌마 생각으로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줌마 뒤를 쫓아가서 따지고 싶었다. “과연 도시엔 아이들이 많이 있어서 서로 집을 오가며 잘 노나요? 어차피 거기도 어린이집 가고 유치원 가야 친구 사귀는 거 아니냐고요. 그리고 심심한 게 뭐 어때서 그래요? 제발 아줌마 생각만으로 이렇게 저렇게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이렇게 윽박지르고 싶었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이 아줌마가 미쳤나’ 소릴 들었겠지만 말이다.

내가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 그동안 비슷한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어쩌다 마주친 사람들까지 마을에 또래가 없어서 어쩌냐며 다울이가 심심할 것을, 사회성 발달이 어려울 것을 걱정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괜스레 주눅이 들어왔던 게 사실이다. 부모로서 아이가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 하나를 못 채워주는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고 괜한 참견이니 그 앞에서 좀 더 당당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는 나도 내 자식이 결핍 없이 자라게 하고 싶었고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거라 여겼지만, 이제는 그것이 비현실적인 소망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채워준단 말인가. 인생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주지 않을뿐더러 결핍 없이 다 가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결국은 내가 바라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주고, 덜 중요한 것은 포기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 셋, 마른 콩대 위에서 콩콩 뛰면서! ⓒ정청라

다울이는 한 번도 심심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물론, 같이 놀자며 일을 방해하거나 일부러 심통을 부리기는 한다. 하지만 엄마가 밥 준비를 하면 밥 하는 놀이를 하면서, 아빠가 나락을 털면 볏단을 옮기는 시늉을 하며 나름 신나게 노는 때가 훨씬 더 많다. 심지어 다울이는 마늘이나 콩 까는 것도 재밌는 놀이로 생각하고 있어서, 자기만 빼놓고 그 일을 하면 야단이 난다. 콩을 까다가 낮잠을 자러 갈 때면 아빠에게 “아빠, 나 없을 때 콩 까지 마. 이따가 같이 해”하고 신신당부를 할 정도다. 그렇게 자기만의 놀이로 하루를 보내며 쉬지 않고 종알거리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나는 그걸로 됐다고 본다. 심심하기도 하겠지만, 심심한들 어떠랴. 그밖에 또 다른 결핍이 있다고 해도 그러면 또 어떠랴. 누구나 무서워하는 결핍은 결국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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