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23]

밤이면 밤마다 산개구리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울려 퍼지니 드디어 봄이로구나 실감을 한다. 게으름에 익숙해졌던 몸과 마음이 겨울 끝자락을 못내 아쉬운 듯 바라보기도 했지만, 날이 풀리니 저절로 움직임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집안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밭에 무성한 냉이를 캐며 냉이 뿌리에 코를 들이대고, 쑥은 얼마나 컸나 머위는 싹이 났나 안부를 물으러 동산에도 오른다. 이 밖에도 다른 할 일은 많지만 내 몸은 봄 맛을 느끼고 찾는 일에 가장 부지런한 듯하다.

경칩을 시작으로 다울이 아빠는 겨우내 벼르고 벼르던 일을 벌였다. 바로 본채 안방 구들 공사! 안방 방바닥을 파내고 구들을 깔아 난방을 하고, 이맛돌 자리에 온수통을 얹어 따듯한 물까지 쓰게 하겠다는 것인데, 또 그것으로 기름보일러를 아예 뜯어내겠다고 혼자서 열심히 사부작사부작 몸을 놀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좋은 집 버리게 생겼네”, “차라리 화목보일러를 놓지 쓸데없는 짓 한다”며 날마다 들락거리며 시찰을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제 할 일을 한다. 그 덕분에 나도 힘을 내어 내 일에 마음을 쏟는다.

▲ 땅콩을 털며 놀고 있는 다울이 ⓒ정청라
한편, 우리 집에서 가장 바쁜 이는 다울이다. 얼마나 바쁜지 사뿐사뿐 걷는 법이 없이 촐랑촐랑 뛰어다닌다. 이제 더 이상 엄마 품에서 더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나이인 건지, 집 밖으로 나가면 엄마를 찾지 않고 제 할 일에 열중한다. 아빠를 도와 흙 죽을 섞거나 벽돌을 나르기도 하고 그러다가 아빠에게 한 소리 들으면 ‘친구 빠빵’이라고 부르는 꼬마 자동차를 타고 마당과 골목을 쏜살같이 누빈다. 또, 소꿉놀이 삼매경에 빠져 흙더미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해 애를 먹이기도 한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저녁밥 준비를 마치고 다울이는 뭐 하고 있나 두리번거려 보았는데 이 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큰 소리로 여러 번 불러도 기척이 없기에 광덕 아주머니댁에 찾아가 보았다. 한두 시간 전에 아주머니와 함께 골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것을 보았던지라 그 집에 따라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가보니 다울이가 안 왔다는 것이다. 그럼 기명이네 집에 갔겠지 싶어 그 집에도 들러 보았는데 거기에도 없었다. 혹시나 마을회관에 있나 했지만, 회관은 텅 비어 있었다.

그쯤 되자 발걸음이 빨라지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혹시라도 마을에 이상한 사람이 와서 데려간 것은 아닌가 하는 해괴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바로 앞집 한평 아주머니네 댓돌 위에 다울이 빨간 장화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아주머니가 교회에 간 시간이라 그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르신과 단둘이 그 집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르신 말로는 어르신 집에 소를 보러 왔다가 어르신이 집 안에 들어가자 자기도 같이 가자며 따라 들어왔다고 했다. 한평 어르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과묵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지라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데 다울이 이 녀석 참 변죽도 좋다.

▲ 마른 콩대 위를 뛰어 다니는 다울이 ⓒ정청라
어르신에게 인사를 드리고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서는데 기명이가 달려왔다.
“다울이 찾았어요? 어디 갔었데요?”
내가 기명이 집에 들렀을 때 저녁밥을 먹던 중이었는데, 다울이가 걱정돼서 밥을 먹자마자 부랴부랴 달려나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광덕 아주머니도 찾아오셨다.
“다울이 없어졌다고 해서 어찌나 걱정이 되던지 말이여. 이 집 담벼락까지 왔더만 다울이 노는 소리가 나서 마음 놓고 집에 갔당께.”

아주머니는 다울이에게 어디 갈 때는 엄마에게 어디 간다고 말하고 다녀야한다며 당부를 하시고는 다울이를 데리고 마을회관에 가셨다. 그러자 할머니 손을 잡고 나서는 다울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엄마, 어디 다녀올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 얘길 듣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마을의 아이로 자라난 다울이가 놀랍고 대견했다. 엄마인 나는 마을의 한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고 마을을 외면하고 싶어 몸부림칠 때도 많은데,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는 마을 한복판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와 이웃 사이에 다리까지 놓아준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게 다 이러쿵저러쿵 말은 많아도 다울이를 친손주처럼 예쁘게 바라보며 관심을 가져주는 이웃들 덕분이 아닌지…. 이럴 때는 마을에 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나를 둘러싼 모든 조건을 고마움 그 자체로 바라보게 된다. 그야말로 다울이 덕에 배우고, 다울이 덕에 사는, 고마운 나날이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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