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25]

“엄마, 배고파.”

다울이가 아침 인사 대신 늘 하는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배가 고프다고 하니 눈 뜨자마자 먹을거리를 잠들기 전에 챙겨놓고는 한다. 그런데 하루는 준비 없이 잠들어 전날 남은 밥 한 공기조차 없었다. 먹을 걸 내놓을 때까지 다울이의 배고파 타령이 이어질 텐데 이를 어쩌나. 빨리 고구마라도 삶아야 했다. 마음이 급하니 고구마를 압력솥에 얹어 가스불로 익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냄비에 찜기를 얹고 고구마를 올렸다. 그러고는 잔가지 몇 개와 갈비(마른 솔잎)를 챙겨들고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땠다. 고구마가 삶아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나로서도 확신이 없었다. 어떤 날은 불 다루기가 수월하여 짧은 시간에 조리가 끝나는데, 어떤 날은 불을 붙일 때부터 애를 먹기 때문이다.

다행히 하늘이 도우셔서 불이 잘 붙었고, 손가락 두 개만한 굵기의 나무토막 몇 개로 15분 정도 만에 고구마를 삶을 수 있었다. 그래놓고 나니 어찌나 뿌듯한지, 나도 이제 불 좀 다루는 거 아닌가 괜히 어깨에 으쓱 힘이 들어갔다. 그동안 불 다루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고구마 삶은 것 하나로 이렇게 으쓱대나.

▲ 본채가 확 달라졌다. 안방에 구들을 놓아 마루처럼 쓰던 공간에 아궁이 등장! ⓒ정청라

돌아보면 우여곡절이 많았다. 겨울에는 신랑이 주로 불 담당을 했으니 사실상 나는 불을 다룰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3월부터 신랑이 안방 구들 공사와 밭 만들기 작업으로 무척 바빠졌기 때문에 불 때고 밥 하는 일이 오롯이 내 몫이 되었다. 또한 밥 짓는 주요 공간이 사랑방 아궁이에서 본채 안방 아궁이로 옮겨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도 필요했는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만삭의 몸으로 아궁이와 부엌을 오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게다가 불 다루는 솜씨는 서툴지, 가스불과는 달리 음식을 익히는 동안 아궁이 앞을 꼼짝없이 지키고 있어야 하지, 음식을 준비하는 시간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밥과 국, 반찬 한 가지 정도를 불 때서 장만하려면 최소 2시간은 걸렸으니 말이다.

한번은 밥 준비가 늦어서 신랑이 밥 때가 되어 집에 돌아왔는데도 밥을 차려줄 수가 없었다. 내 딴에는 허둥지둥 바쁘게 움직였지만 생각처럼 일이 척척 되지 않으니 어쩌랴. 결국 신랑은 배 고파 죽겠는데 밥을 안 준다며 화를 내고 다시 밭으로 가버렸고, 나는 아궁이 앞에서 서럽게 눈물을 떨구었다. 일하고 돌아와 잔뜩 허기져 있는데 제때 밥을 주지 않아 화가 난 신랑 마음도 이해는 되었다. 그러나 서툴 수밖에 없는 내 처지도 좀 배려해 주고 격려해 주면 얼마나 좋은가. 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해주는 신랑이 미워서 이제부터는 신랑이 뭐라 해도 가스불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전에는 가스레인지를 쓸 때 안 좋은 냄새가 난다는 걸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가스레인지를 멀리 하는 사이 가스 냄새가 굉장히 역하게 느껴지게 됐기 때문이다. 하는 수없이 화를 누그러뜨리고 살아 있는 불과 친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불과 부대껴야 하는 눈물 나고 살 빠지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불 때며 밥을 하다 보니 살이 빠졌다. 뱃속의 애가 자랄수록 몸무게가 늘기 마련일 텐데, 지난 한 달 남짓 동안 내가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일수록 불 다루는 솜씨가 나아진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불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지 잔머리도 늘어갔다. 예를 들자면 낮에 밥을 하면 저녁엔 국 끓이고 반찬을 하여 조리 시간을 나누는 식이다. 그렇게 하니 밥 준비하는 시간이 1시간 정도로 줄었다.

또, 불에 올리는 순서대로 미리 냄비를 하나씩 준비해 놓고 차근차근 불을 때니 왔다갔다 움직이는 번거로움이 줄었다. (차라리 옛날식 부엌이라면 불 때는 아궁이가 여러 개거나 솥 얹는 데가 여러 군데로 되어 있어 부엌 일이 쉬울 텐데, 그럴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적응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보며 나물거리를 다듬거나 다울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등 여유도 생겼고 손님을 맞을 때도 가스레인지의 힘을 빌리지 않게 되었다.

▲ 냄비에 국을 데우는 중인데 다울이가 불을 보고 있다. ⓒ정청라

지난 주말에는 친구들 여럿이 우리 집에 왔는데, 사실 오기 전에 고민이 됐다. 와서 이것저것 만들어 먹겠다고 장을 봐 온다고 하는데 음식을 이것저것 장만하려면 가스레인지를 써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한 마음을 먹고 ‘우리 집은 가스레인지를 안 쓴다’며 까칠한 선언을 했더니 오히려 친구들은 그런 상황과 조건을 반기며 재미있어 했다.

그리하여 잡채부터 불고기, 굴전, 김밥까지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먹고 갔다. 불 앞에 앉아 불을 보는 것도 무척 좋아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는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모두를 사로잡는 마력이 숨어 있는 것일까?

하긴 정말 그렇다. 솥에 밥을 올려놓고 불 앞에 앉아 불을 때다 보면 그야말로 명상의 시간이 펼쳐진다. 나무가 타닥타닥 타들어가며 너울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면 한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옛날 원시 부족들 가운데는 불을 숭배하는 부족도 많았다고 들었는데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너울너울 일렁이는 불빛에 깃든 신성이 수천 년 세월을 건너와 내 몸과 마음 깊은 곳까지 와 닿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러면서 불과 친해져 가는 것일까?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내 속에 잠들어 있는 불 사람과 하나 될 수 있겠지! 불 사람이 되고 싶은 나는, 날이면 날마다 손이며 얼굴에 검댕을 묻히고 산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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