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21]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합천에 살 때 “이모! 이모!” 하며 나를 잘 따르던 이웃집 아이 구현이. 휴대폰으로 연이어 문자를 보내오길래 “너 심심하냐? 그렇게 심심하면 이모 집에 놀러 와라.” 했더니 정말 그날 즉시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마침 구현이네 집에 와 있던 손님이 구현이를 순천까지 바래다줘서, 우리 신랑이 순천으로 마중을 나가 데려오게 된 것!

오랜만에 형을 만난 다울이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말도 다 터지지 않았을 때 이사를 왔건만 아기 때 나누었던 정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친형을 만난 듯이 애틋해하며 형아 옆을 떠날 줄을 몰랐다. 구현이는 구현이대로 다울이를 친동생처럼 각별하게 생각해서 다울이의 애정공세가 싫지 않은 듯 연신 들떠 있었다.

▲ 보성 회천 바닷가에서. 사진 속에 기명이도 함께였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청라
그때, 우리 집에 어린 손님이 온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웃집에 사는 기명이까지 찾아왔다.(기명이는 올해 열세 살이 된 이웃 아이인데 할머니,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마을에 또래가 없으니 할 수 없이 다울이하고 라도 놀려고 우리 집에 자주 놀러온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부터 사춘기에 접어드는 것 같더니 놀러오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기명이와 구현이는 자기 또래 친구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기뻤는지 금세 친해졌고, 친구에 목말라 있던 세 머시매가 찰떡궁합이 되자 우리 집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 고함 소리와 웃음 소리에 마을 전체가 떠나갈 지경이었다.

구현이는 우리 집에 온 것보다도 한 살 위 형인 기명이를 만난 것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아예 눈 뜨자마자 기명이 집에 놀러가고, 기명이 가는 데만 졸졸 따라다니지 뭔가. 다울이는 다울이대로 형들 뒤를 따라 온 마을을 누비며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놀았다. 그러다가 배고플 때만 집에 잠깐 들어와 지들끼리 낄낄거리며 담소를 나누었다.

“야, 니네 마을에는 친구나 동생 없냐?”
“응. 동생들이 있긴 있는데 나보다 많이 어려서 같이 놀기는 좀 그렇고….”
“나랑 똑같네. 너는 학교도 안 다니니까 나보다 더 심심하겠다. 나는 학교 가면 친구들 많이 있는데…. 근데 넌 학교는 왜 안 다니냐?”

이렇게 지들끼리 속 이야기를 하며 서로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면서 둘 사이에 우정이 싹틀 수 있도록 성심껏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라나는 가정환경과 조건은 많이 다르지만, 산골에 산다는 공통점, 친구에 목말라 있다는 공통점이 서로를 끈끈하게 이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둘에게 재미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욕심에 신랑에게 구현이 데려다 주는 날 기명이까지 데리고 나가서 바닷가에도 가고, 목욕탕도 가고, 애들 좋아하는 거라도 사 먹이자고 제안했다. 신랑은 썩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내가 앞서 나가서 내 마음대로 아이들을 놀래어 줄 깜짝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오싹 오그라들게 하는 사건이 하나 생겼다. 화순에 볼일이 있어서 구현이를 데리고 나갔다 오려고 했는데 구현이는 집에 남겠다고 했다. 내일이면 집에 가야하는데 가기 전에 기명이 형이랑 질릴 때까지 놀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명이에게 구현이를 부탁하며 “우리가 점심 지나 오후에 올 것 같아서 구현이 점심을 챙겨줄 수가 없네. 너희 집에서 밥 좀 같이 먹어도 되지? 대신에 우리가 돌아올 때 맛있는 간식거리 사올게.”하고 말해두었다. 물론 기명이는 자신 있게 그러겠다고 대답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찰떡같이 믿고 밖에 다녀왔는데, 돌아와서 물어보니 구현이가 아직 점심도 못 먹었다지 뭔가? 왜 안 먹었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잠깐 나가 있는 사이에 기명이 형이 혼자 라면을 끓여 먹었다고 했다. 그 얘길 듣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기명이는 우리 집에서 자주 밥을 같이 먹고는 했다. 밥때가 되어 놀러 왔는데 밥을 안 줄 수도 없고, 게다가 맛있는 거라도 있으면 일부러 불러다 함께 먹었던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기명이가 마음이 쓰여서 챙겨주려고 애를 써왔던 것! 그런데 그깟 라면 한 봉지에 이렇게 치사하게 나오다니 해도 해도 너무했다. 아무리 아이라지만 그래도 알 만큼 아는 나이인데 먹는 것으로 그렇게 얄밉게 굴 수가 있나? 부탁을 안 했으면 몰라도 구현이 점심 좀 챙겨주라고 특별히 부탁까지 해 두었는데 말이다. 나는 기명이가 너무 얄미워서 간식으로 사온 피자도 기명이 빼고 우리끼리만 먹고 싶었다.

하지만 구현이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형이 밥을 안 주어서 그때 당시는 조금 서운하고 얄밉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기는 괜찮다는 것이다. 피자도 당연히 형이랑 같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얘길 듣다 보니 내 마음이 열두 살 아이보다 좁구나 싶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기명이와 기명이 누나까지 다 같이 불러 피자를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게눈 감추듯이 피자를 먹어치우는 기명이를 고운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게 되었다. 눈치 빠른 기명이는 내 말투와 목소리에서 낌새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피자만 먹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바닷가 여행은 기명이 빼고 우리끼리만 가게 되었다. 기명이도 함께 왔으면 정말 좋아했겠다 싶었지만, 서운했던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아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기명이의 영악함과 약삭빠름, 그것이 그 아이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망감을 쉽게 지울 수가 없어서 말이다. 이렇게 속이 좁은 걸 보면 나는 아직 어른이 덜 됐나 보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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