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의 마을에서 살아남기-12]

추석 연휴 하루 전날, 사랑방 바닥에 콩댐해야지 며칠 집을 비우기 전에 집단속도 해야지 신랑도 나도 한창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와중에 범수 아빠가 오셨다. 오늘도 술을 잔뜩 드셨는지 발자국 소리까지 비틀거린다. 제발 좀 그냥 가 주셨으면 싶어 일부러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다울아! 제수씨!”하고 부르며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오신다. 손에 들린 큰 대접에는 동동주가 가득 채워져 있다.

ⓒ박홍기

“신랑 어디 있소. 와서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하쇼. 안주거리는 뭐 좀 없소?”

할 수 없이 신랑이 들어와서 막걸리 잔을 받아 들고, 나도 안주거리를 몇 가지 낸다. 아무리 바쁜 척을 해도 그냥 돌아갈 분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요즘 범수 아빠는 산에서 능이버섯을 따서 돈을 꽤 벌고 계신데, 그래서 기분이 좋으신지 날마다 술타령이시다. 아니, 버섯은 핑계고 몇 달 전부터 내내 술 마실 이유를 찾아내어 주구장창 술을 달고 사신다. 심지어 우리 집 지붕이 부서졌을 때는 그것 때문에 속상하다며 술을 드셨으니, 범수 아빠께는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일이 술 마실 핑계거리인가 보다.

문제는 술을 드시면 곱게 드시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다니며 술주정을 하신다는 거다. 가끔은 오늘처럼 우리 집에 불쑥 들이닥치시기도 하는데, 우리 편에서 본다면 그날은 그야말로 피박 쓰는 날! 게다가 오늘은 다울이가 이상한 아저씨라고 부르는 끝집 아저씨까지 가세했다. 원래 두 분이 함께 술을 드시다가 면에 있는 식당에 가서 한 잔 더 걸치기로 했는데, 중간에 범수 아빠가 우리 집에 오시게 되면서 졸지에 우리 집이 2차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두 분이 한 자리에 앉자마자 한 목소리로 우리 신랑을 잡아먹을 듯 소리를 치신다.

“너 그렇게 살지 마라. 너 진짜 맘에 안 들어.”

뜬금없는 호통에 대체 뭔 일인가 싶어 귀를 쫑긋 기울이는데, 또 육고기를 안 먹는다고 잔소리를 하시는 것이었다.

“니가 안 먹는다고 처랑 아들까지 못 먹게 하지 마. 특히 한참 크는 아이들은 단백질이 부족하면 크지를 않는 법이여. 괴기도 자주 사다 먹이고, 먹는 거 가리지 말고….”

두 분이서 쿵짝이 얼마나 잘 맞는지 우리 신랑은 느닷없이 혼나는 아이가 되어 버렸다.

“저도 다울이하고 아내한테는 강요 안 해요. 집 사람도 원래 고기를 즐기지 않는 편이고, 다울이는 가끔씩 생협에서 고기 사다 먹여요.”

이렇게 대거리를 하지만 술을 드신 분들 귀에 신랑의 말이 들어올 리가 없다. 그냥 자기 기분에 취해서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하고 하는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한 달쯤 전까지만 해도 칼부림이 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분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지만 범수 아빠 말로는 끝집 아저씨가 자기를 질투해서 자기가 키우는 벌통에 해코지를 하려고 한다고 했다. 벌통에 농약을 친다고 했다던가?

아무튼 그즈음 범수 아빠는 술을 드실 때마다 끝집 아저씨 때문에 괴롭다며 분통을 터트리시고는 했는데, 그런 얘기가 나돌고 얼마 뒤에 끝집 아저씨가 술에 취해 범수 아빠를 잡으러 다녔다. 범수 아빠가 다른 집에 숨어 안 보이자 그 집 문짝을 다 뜯어 놓고, 새벽까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댔다. 정말이지 무서운 일이 일어나는 거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한 밤이었다.

그날 이후로 범수 아빠가 한 달 가까이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키우던 벌들도 다 처분을 했는지 아랫마을에 사는 아저씨가 벌통을 옮겨갔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범수 아빠가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말이 나돌았고 한 달 사이에 범수 아빠가 사는 집은 폐가처럼 되어 갔다. 우리는 당연히 범수 아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돌아오신 것이다. 집이 너무 더워서 광주 집에 가 있었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시면서.

범수 아빠가 오셨으니 끝집 아저씨가 가만히 있지 않겠구나 싶어 걱정스러웠는데, 놀랍게도 그날 이후로 마을은 조용했다. 그러다가 끝집 아저씨네 나락을 먹어치우던 멧돼지를 범수 아빠가 올무로 잡아 주면서 관계가 반대 방향으로 급 발전! 끝집 아저씨는 범수 아빠를 죽일 놈이 아니라 고마운 사람으로 불렀다. 또, 최근에 끝집 아저씨가 딴 능이버섯을 범수 아빠가 좋은 가격에 팔아주면서 두 분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천하에 둘도 없는 형 동생 사이가 되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관계다. 지금껏 나쁜 놈은 나쁜 놈,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 이렇게 엄격하게 구분 짓고 생각을 나누어 사는 데 익숙해져서일까? 어떻게 죽일 놈이 하루아침에 고마운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만 여겨진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게 마을이라고 하는 오래된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저력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울려 살다 보면 사람 마음이 원수도 됐다가 동지도 됐다가 하면서 뒤섞여 흐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그래, 인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과 동지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있는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일 게다.

두 분 아저씨를 바라보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생각으로 진실을 외면하며 살아왔나 많이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돌아보라고, 너무 치우쳐서 살지 말라고, 하느님께서 귀찮고 성가신 이웃들을 가까이에 두신 거겠지? 작은 마을이지만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있다 보니, 배울 거리가 참 많다.

정청라
귀농 6년차, 결혼 4년차 되는 산골 아낙이다. 유기농 이웃들끼리만 사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살다가, 몇 달 전 제초제와 비료가 난무하는 산골 마을 무림으로 뛰어들었다. 왕고집 신랑과 마음 여린 아들 다울, 이렇게 세 식구가 '알콩달콩 투닥투닥' 뿌리 내리기 작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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